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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배경

옛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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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6년 윤경문(베드로), 윤봉문(요셉) 형제는 부모를 잃고, 진목정 진요한 댁을 경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세자 15명을 입교시켜 첫 고해성사를 받기 위해 당시 경상도 지방을 담당하고 있던 선교사 로베르 신부님을 초대하였다. 그때 40명 이상의 예비신자도 새로 탄생됐다.

  로베르 신부님이 고해성사를 주고 떠난 지 한달 후 사군란의 회오리에 15명의 영세자들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고 윤 요셉은 순교를 당하였다. 진목정은 '천주학 마을'이란 소문이 나게 되자 박해를 두려워한 주민들은 마을이름을 국산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목정 공소의 초대 회장인 윤경문(베드로, 순교자의 형님)이 사군란으로 흩어졌던 신자들을 다시 모아 공소를 이끌어 나가게 되면서부터 교회는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1890년 부산 영도에서 은신하시던 조모이세 신부님이 거제도에 전교활동을 하셨는데, 그때 순교자와 그 친척들의 빼앗긴 재산들을 찾기 위해(소유자 윤씨에게 되돌려지도록) 거제부사를 만나 요청하였었고, 그 후 재산 반환은 안됐지만 일부 토지문서는 돌려 받게 되었다.

  조 신부님의 후임으로 부산 본당 2대 신부님인 오우도 바오로 신부님께서 1893년부터 거제도에서 전교활동을 하셨고, 그때에도 윤경문의 빼앗긴 재산을 찾을 수 있도록 다시 노력하였으나 일부 땅만 돌려 받았다. 1902년 민 대주교님의 격려 방문은 사군란으로 박해받았던 교우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이후 진주 문산본당 설립 후 쥴리앵 권신부님께서 조랑말을 타고 와서 전교하셨다. 1913년 1월 진목정 공소에서 현재의 동부면 명진공소가 새로 설립되어 분리되었고, 12월에는 역사적인 안 주교님의 초도순시가 있었다. 또 1917년 12월 안 주교님으로부터 전교선을 선물 받아 전교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하였다. (당시 전교선은 유일한 것이었지만 보존하지 못하여 없어지게 되었음)

  신자수의 증가로 인해 1917년 12월 동부면 탑계(탑포) 공소와 신현읍 재산 공소 설립차 안 주교님께서 국산공소에 2차로 내방하셨는데 그때 고해성사자가 236명이었고 새 영세자가 232명, 견진자가 50명이 탄생되었다.



  46년간 공소생활(1909~1926, 부산 범일동 천주교회 소속) 끝에 1926년 5월 30일 성삼주일에 진목정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어 김후상(바오로) 신부님(1926. 5. 30~1942)이 초대신부로 부임했다. 거제 최초의 성당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이 성당은 첫 신자 진요한이 윤스다니슬라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그의 사랑터이며, 순교자 윤요셉이 살았던 초가를 개조한 것이니 이곳이야말로 명실공히 거제도 천주교회의 발상지임과 동시에 순교자 유적지로서 거제도 천주교회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1933년 8월 31일 국산성당 신자들은 이 국산성당을 거제도 초대성당으로서 건평 50평의 콘크리트 성당과 그 외 사제관과 부속건물 2동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유적지로 보존하기 위해 뜻 있는 신자들이 합심해서 연경답으로 1,000여 평의 대지를 프로리앙드망쥬(프랑스인 세화) 대구교구장을 통해서 본당에 기증하였다.

  이후 국산본당은 제2대 유경선 신부님(1942~1946), 제3대 김준필(아오스딩) 신부님(1946~1949), 제4대 최 비안네 신부님(1949~1950. 4. 16), 제5대 박문선 신부님(1950. 4. 16~1959. 12), 제6대 강영철(방지거) 신부님(1959. 1. 13~1961. 12. 4), 제7대 김영제(요한) 신부님(1964~1966. 5. 14 선종)까지 40년 간 본당을 유지하였다. 그 사이 1962년에 장승포 본당이 설립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유일한 국산본당으로 장승포에서도 국산까지 걸어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제7대 김영제 신부님이 선종(1966년)하신 후 옥포본당이 승격(1983. 7. 1)되기까지 약 17년 간 장승포 본당 소속 공소로 유지되다가 옥포본당이 설립되면서 공소 성격도 상실되고 종교적 유적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거제도 최초의 성당이었던 국산성당이 1966년 장승포 본당의 공소로 전락되기 전부터 옥포 성전 재건의 꿈들은 이미 싹트고 있었다.

  이 소망들이 구체적으로 가시화 된 것은 1970년대 옥포만에 대단위 조선공단이 조성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아울러 신자수가 증가하던 1980년대 초부터였는데, 장승포 본당의 정순구(요한)신부님께서 부임하시던 그 청사진이 완성되고 현재 모습의 성전이 하느님 대전에 봉헌되기에 이른다.

  순교로 꽃피운 거제도 지역의 신앙의 뿌리도 옥포성당 건립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거제도 지역은 전국의 그 어느지역보다도 천주교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며 특히 순교자의 유해가 안장된 옥포지역에 옥포성당이 건립된 것은 그 뜻이 크다고 하겠다.



  옥포성당 설립 준비 위원회가 발족된 것은 1982년 봄이었다. 위원장은 당시 장승포 본당 사목회장을 역임하던 배정섭(금구)형재가 맡으셨으며 해성학교 이동현(요한) 학교장, 국산공소 한영수(실베스텔) 형제 그리고 당시 장승포 성당 사목위원들이 준비위원직을 겸하였다.

  준비위원회는 옥포성당 설립계획을 수립하고, 재정확보를 위한 교우 신립금 책정, 국산공소 소속 토지 매각 등의 업무를 수행 하였으며 성전 건축에 관련되는 사항들은 대부분 정순구(요한) 신부님과 당시 대우조선소 건설을 담당하던 (주)대우 소속 신자 임원급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졌다.



  옥포성당의 건립 공사비는 총 1억 8천만원이 소요되었는데 이중 약 1억원 정도는 국산성당시절 확보되어있던 토지를 매각하여 마련하였고, 나머지 8천만원은 신자들의 신립금 모금과 교구청의 지원으로 충당되었다. 이때 매각된 토지는 대지 2평, 전 508평, 탑 1355평, 임야 4500평 등 14필지였다.


  옥포성당의 신축공사는 1982년 11월 2일 건설허가를 득한 후, 동년 11월 15일 착공식을 갖고 준공검사 일자는1983년 11월 2일이었다.

  옥포성당의 설계는 서울의 삼정건축설계공사의 박상돈씨가 하였으며, 건축은 (주)대우에서 하였는데 당시 (주)대우에 근무하던 교우들의 협조로 원가에도 못미치는 낮은 가격에 성당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옥포성당의 건축면적은 지하 28.99㎡, 1층 617.22㎡, 2층 421.47㎡, 3층 96.99㎡로 총면적 1,164.58㎡ 이며 최고 높이가 19.55㎡ 이고 철근 콘크리트 철골 트러스트 및 슬라브 건물이다.



  신축된 옥포성당이 하느님 대전에 봉헌된 성전 축성식은 1982년 7월 19일이었다. 당시 장병화(요셉) 주교님의 주례로 집전된 첫 미사에는 교구내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 그리고 지역의 단체장들이 대부분 참석하여 이 날을 기렸으며 성당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만큼 많은 신자들이 운집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이날 행사에는 1부 축성식, 2부 미사, 3부 오찬식 및 사물놀이 공연이 있었는데 2부 기념미사 후 에는 그동안 성전신축에 기여한 공로자들에게 시상식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