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성탄 담화문
아기 예수님,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분
사랑하는 우리 교구 모든 분들이 주님 성탄의 은혜로 평화와 기쁨을 가득히 누리시길 빕니다.
성탄 대축일 밤 미사에서 우리는 루카 복음서를 듣게 됩니다. 북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한 어린 처녀가, 로마 황제의 호구조사령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서, 만삭의 몸으로 지아비의 본적지인 남쪽 유다지방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해산날을 맞게 되었는데 몸을 풀고 아기 누일 방 하나 구하지 못해 결국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짐승의 먹이통에 뉘었습니다. 이 가련한 이야기가 우리가 ‘주님’(퀴리오스 Κύριος)이라 부르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 모습이고 아울러 이 죄 많은 세상에 ‘기쁜 소식’(복음: 에우앙겔리온 ευαγγὲλιον)이 시작되는 첫 장면입니다.
루카 복음의 이 대목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 안에는 묘하게 숨겨진 커다란 대비(對比 contrast)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아우구스투스라는 황제를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루카 2,1)
고대 중국 역사에서 진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쳐 이기고 패권을 잡은 후 왕이 자신을 처음으로 황제로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하여 진시황제라 했듯이, 서양 지중해 패권왕국 로마 역시 죽이고 죽이는 권력다툼 끝에 최후의 승자가 스스로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 지존 至尊)라 부르며 시황제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죽이고 죽이는 권력다툼 끝에 쟁취한 최고(最高)의 자리에 앉은 절대자를 뜻합니다. 실제로 황제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를 ‘주님’(Κύριος)이라 부르며 거의 신으로 떠받들었습니다. 또한 황제의 이름으로 임명된 사령관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소식을 황제의 이름으로 알렸는데 그것을 ‘복음’(에우앙겔리온 ευαγγὲλιο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몇 개의 용어를 통해 최고 권력자인 로마 황제와 포대기에 싸여 짐승의 먹이통에 뉘어있는 예수 아기를 날카롭게 대립시킵니다. 최고의 자리에 앉은 황제는 무력으로 그 자리를 ‘쟁취’했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 누운 갓난아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황제는 ‘무력(武力)’을 사용하지만 갓난아기는 ‘무력(無力)’합니다. 황제는 무력(武力)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만 갓난아기는 무력(無力)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옛말에 ‘왕은 하늘이 내려준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왕입니까? 힘으로 자리를 쟁취한 자입니까, 하늘이 내려준 분입니까?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자입니까, 하느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분입니까?
이 대비를 통해서 복음사가는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분은 저 황제가 아니라 이 아기라고,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황제가 아니라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라고 힘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 또한 힘으로 상대를 누르고 이겼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기운을 받아 상대를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죄와 악에 대해 승리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 참된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입니다.
세상은 스스로를 높여 자기를 드러내는 길을 구하지만 우리 주님은 스스로를 낮추어 아버지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이 표징을 통해서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작년과 올해 사목교서를 통해 진정한 평화와 참된 자유의 원천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것을 이루는 길은 용서의 실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지금은 우리나라가 매우 위중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진정한 평화와 참된 자유를 주시라고 아기 예수님께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립시다. 아멘.
2019년 성탄절에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