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미약한 사람들'도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형제애가 느껴질 때, 빠뜨리안 회는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발언은, 마치 쇠사슬의 고리가 다른 고리를 끌어당기듯이, 다른 사람들로 발언하도록 이끄는 도화선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토론을 벌이다 보면 회원들은 미처 몰랐던 지식을 얻게 되고, 산발적이고 개별적으로 알고 있던 가톨릭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과 흥미가 더해 갈수록 회원들은 그리스도 신비체와의 일치 속으로 더욱 깊이 젖어 들게 되고, 그 신비체의 생명을 받게 된다.
그 밖의 여러 면을 살펴보더라도, 빠뜨리치안 회가 레지오의 이론과 기술을 응용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레지오 단원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여, 쁘레시디움에 대하여 확신을 갖는 것처럼 빠뜨리치안 회를 운영하는 일에도 뚜렷한 소신을 지녀야 한다.
이러한 소신은 이 회를 이끌어 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대하여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줄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나 교회 공동체 안의 신자 상호간에 신앙 문제에 대해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침묵주의'라는 말이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쉬넨스 추기경은 "우리는 흔히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라고 지적하였다.
대개 가톨릭 신자들은 신앙적인 면에서 남을 도우려고 나서지 않는 것이 사실인듯하다.
진지하게 물어오는 사람들에게조차 올바른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형편이니, 결국 가톨릭 신자들은 믿지 않는 이들을 복음화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좋지 않은 인상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잘못된 현상이 널리 퍼지게 되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 그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와 같은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신앙 문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경우에 신자들이 입을 꼭 다물고 있거나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대개 대화를 이끌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가) 이러한 신자들은 자신의 교리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만한 기회는 무조건 피하려 든다.
(나) 교리 지식은 상당한 정도 갖추고는 있지만, 마치 교리 무답의 해답처럼 따로따로 떨어져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이다.
이런 지식들은, 마치 자동차의 부품이나 인체의 각 부분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각자의 신앙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더구나 몇몇 중요한 교리 항목에 대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있으므로, 이런 때에는 교리에 대한 지식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따라서 비록 토막 교리 지식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해도, 부품들이 올바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기계처럼 제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 더 많은 경우에, 너무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신자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반쪽 믿음' 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믿음은 종교와 거리가 먼 환경과 부딪치게 되면 쉽게 무너지고 만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이상과 같은 문제들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