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입교자를 찾아 나서자.
"교회가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온 세상에 확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 주려는 것이다." 라고 교황 비오 11세가 엄숙하게 선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교회에 이끌어 들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때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돌보는 문제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막상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국 교회 안의 신자들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해서 놀랄 일이 아니지 않은가?
여기에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에 관심을 갖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선물을 전하는 가장 훌륭한 의지를 실천에 옮기려면, 소심하고 수즙은 마음이나 체면, 또는 그 밖의 이런 저런 어려움들을 모두 이겨내야 할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파되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열성을 바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말한다.
그러나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해야 할 행동을 못하게 막거나 그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신중야 한다.
하나의 조직체 안에서 신중함일 담당하는 올바른 기능은 '브레이크', 곧 제동장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중함이 '엔진', 곧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잘못이 빚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의 결과는 활동이 멈추게 되는 것인데, 그제서야 사람들은 놀란다.
과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이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몸을 사리거나 쓸데없는 두려움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 교황 레오 13세가 잘못된 양극단이 라고 낙인 찍은 바 있는 '분별 없는 행동'이나 소위 '지나친 신중' 이라는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많은 영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라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떠내려 가 버린 영혼들을 구할 수는 없다.
영원한 깊은 심연이 그 영혼들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노력을 기울여 다른 영혼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결국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게 되고 만다." (쉬네스 추기경)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의혹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그 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서 참다운 믿음과 평화가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납득 시켜야 한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어떻게 그 진리를 알 수 있겠는가?(사도 8,30-31)
만일 가톨릭 신자들인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꼼짝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들의 엄청난 오해를 어떻게 풀 수 있겠는가?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들의 냉랭한 겉모습을 보고 그 마음속에 들어있는 믿음의 따스함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열성을 보인 일이 거의 없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믿음을 보며, 믿지 않는 자신들과 별로 또는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해서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가톨릭의 교리나 주장을 대중 홍보 매체나 공공 집회를 통하여 알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방법도 개인 접촉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효과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만일 홍보 매체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접촉하는 선교 방식이 효과가 있다면, 홍보가 과학적으로 이루어지는 현대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대라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조차 그대로 유지 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참으로 효과적인 선교 방법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뿐이다.
방송이나 출판 매체는 '믿지 않는 양들'을 '착한 목자'에게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일깨워 주거나 도와 주는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일의 중심이 되는 활동은 개인적인 접촉과 호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데릭 오자남은 "한 영혼을 끌어 올리려면 다른 또 하나의 아름다운 영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영신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을 구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랑의 법칙이 작용해야 하므로, 주는 사람이 없으면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래도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 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편견과 무지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움직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편견이 사실상 널리 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거의 선천적이고, 더욱이 교육을 통해서 굳어져 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 가톨릭 평신도가 앞에 나서서 싸울 수 있는 수단이 있겠는가?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 교회의 교리 속에는 훌륭하고 빛나는 값진 보검이 있다.
이 보검의 성능에 관해서 뉴만 추기경은 "나는 진리의 힘과 승리에 대해서 강력한 혁신을 가지고 있다. 진리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사탄이 설사 이 진리의 힘과 승리를 줄이거나 더디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 라고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늘 명심해야 할 또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이 원리를 우리 신자들이 생활 속에서 바르게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진리는 오류와 싸울 때 결코 화를 내지 않으나, 오류는 진리와 싸울 때 절대로 조용한 법이 없다." (드 메스트로)는 가르침이다.
앞서 되풀이해서 강조된 바와 같이 , 입교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접촉할 때에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논쟁을 벌이는 태도나 고압적인 자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겸손과 사랑, 그리고 성실함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말 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의 본질적인 요소가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언행이 순수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상대방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심한 반발이 나올리 없고, 틀림없이 깊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되므로, 마침내 우리의 선교 대상자가 입교할 가능성이 한결 높아지게 된다.
버밍검의 대주교였던 윌리엄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붙드는 것이다.
믿음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가는 불길이다.
믿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전파되며,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는 믿음을 전파할 수 없다.
믿음은 오로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으로부터만 전해 받는다.
자신에게 무관심 하거나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으로부터는 믿음을 전해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
이처럼 개인 접촉이 꼭 필요하다고 볼 때, 한 사람의 일꾼이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제대로 돌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입교자를 많이 얻으려면 많은 일꾼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은 더욱더 많아져야만 하는 것이다.
활동 계획을 세울 때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유의해야 한다.
(가) 공부가 필요하다.
논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지한 질문에 성실하고 바르게 답변함으로써 상대방을 인도하기 위함이다.
(나) 새로 입교한 교우들이 기존 신자들의 우정 어린 도움을 받도록 보살피고, 알맞은 사람이면 레지오에 입단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한 교우들이 레지오에 입단하면, 입교하기 전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활동에 적격자가 될 것이다.
(다) 교리반에 나오다가 중단한 사람들의 명단을 교리 교사로부터 확보하여 연락을 취한다.
예비신자들이 교리를 중단하는 이유는 입교 영세하려는 마음이 식은 것이 아니라, 참석할 수 없을 만한 돌발적인 사정 때문인 경우가 보통이다.
이렇게 불가피하게 한두 번 결석하다 보면 부끄러운 마음도 들고, 또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다시 출석할 기회를 잃어버려 탈락하게 된다.
(라) 레지오 단원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면,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생긴다.
신자들의 경우에도, 마음속에 괴로움이나 슬픔을 지녔거나 그 밖의 어떤 어려움에 부딪친 사람들에게는 기도를 바치도록 권장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영성 서적을 읽도록 돌보아 주고,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과 성모님의 모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의 방법은 생활 속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믿지 않는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할 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활동 당사자인 단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접촉할 때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세속적인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 되면 활동 대상자에게 전혀 위안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믿음도 보여 주지 못하고,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들은 이러한 접촉의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이러한 때, 즉 생활 속의 시련으로 인해서 평상시 신앙 대화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영적인 대화를 고맙게 받아들이며, 그로부터 활동의 풍부한 열매를 맺도록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마)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하루 피정이 여러 곳에서 열린 바 있다.
피정의 기본 순서는 미사 봉헌, 세 차례의 강의, 질의 응답, 점심 식사 및 다과, 성체 강복 등으로 짜여지며, 때때로 해설을 곁들여서 영화를 보여 주기도 한다.
수도원에서 피정을 실시하면 이상적인 분위기가 마련될 것이며, 믿지 않는 사람들이 평소에 지니고 있던 오해와 편견을 씩을 수 있게 된다.
피정을 준비하려면 우선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진행 순서가 적힌 초대장을 인쇄하여 그 지역의 레지오 단원이나 다른 가능한 모든 경로를 통해 신자가 아닌 주님들에게 보내고, 피정의 취지를 설명한다.
이 초대장을 올바로 활용하면 심리적으로도 효과를 거두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초대장을 마치 광고 전단을 돌리는 식으로 마구 뿌려서는 안 된다.
초대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놓고, 그들이 초대장을 받은 후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살펴야 한다.
초대장은 피정에 참석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에게만 발송한다.
초대장을 인수한 레지오 단원이나 그 밖의 협조자는 피정에 참석할 사람들을 찾아내는 임무도 띠게 된다.
자신이 위임받은 초대장을 다 돌려야만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며, 초대장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 줄 따름이다.
믿지 않는 이들을 피정에 참가시킬 때는 대개 그를 피정으로 이끈 가톨릭 신자 친구가 데리고 오는 것이 관례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낯선 피정의 집에 와서 서먹서먹하게 느끼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질문에 대답도 해주고, 피정하는 동안 사제를 만나 보도록 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정중에 반드시 침묵을 지키도록 할 필요는 없다.
피정 대상자는 남녀 제한이 없다.
이러한 특수한 피정은 그 자체의 목표에 충실해야 하므로, 이미 영세한 교우나 냉담 신자는 함께 참석 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피정에 초대할 만한 사람들을 많이 접촉하면 할수록 참석자 수는 많아질 것이며, 참석자 수가 많을수록 입교자 수도 그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다.
실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입교자의 비율이 증가된다는 사실이 경험을 통해서 밝혀졌다.
따라서 접촉 대상자의 수를 배로 늘리면(이 일은 확실히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힘을 쏟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 입교자 수도 배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