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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구역 대건반

박재영 빈첸시오님의 성지순례 후기입니다.

 

♤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금년에는 법정기념일이며 공휴일인 6월6일 현충일이 공교롭게도 카렌다의 금요일 자리에 떡하니 빨간 글자로 자릴 잡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직장인들은 본의 아니게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간의 연휴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달 전에 아내는 우리 가족들이 다니는 옥포성당에서 주관하여 떠나는 ‘성지순례’에 함께 참석하자는 얘길했었다. 그 배경은 현충일인 6월6일은 딸과 사위가 출근하지 않고 쉬는 날이라, 아내가 등교하지 않는 초등학생 손자를 돌보지 않아도 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처럼 만에 아내와 함께 성지순례를 떠나기로 결정을 했다. 성지순례 장소는 충청남도 청양군에 위치한 ‘다락골 성지’로 정해져 있었다.

 다락골 성지는 1821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태어나신 ‘새터'가 있는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중국 상해성당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서품을 받으신 분이다. 부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모친 복자 이성례 마리아는 1839년에 기해박해로 순교하셨다. 마카오로 해외유학을 떠난지 13년 만에 귀국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땀의 증거자'와 ‘길 위의 사제’라 불릴만큼 이 땅에 신앙의 씨를 뿌리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전국을 누비셨다. 그 성스러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계속된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문경에서 1861년 6월15일 40년 짧은 생을 마감하시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선종하셨다. 그리고 이곳 청양 다락골 성지에는 산 위에 이름없는 순교자들의 묘지인 ‘줄무덤 성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탄압하던 1866년부터 5년 동안 지속된 병인박해 때 홍주감옥에서 순교한 교도들이 37기의 무덤에 매장되어 있다. 불러줄 이름조차 없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은 한 무덤에 여러 사람들을 가족단위로 함께 묻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줄묘’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성당 사무실에 비치된 ‘성지순례 참석자 신청서’에 인적사항 기록과 동시에 참가비를 성당에서 지정한 계좌에 온라인 이체로 납부를 했다. 이후 세 차례 주일미사에 참석한 끝에 비로소 D-day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우리 집에서 승용차로 출발하여 성지순례 참석자들이 탑승할 버스가 있는 옥포 주차장까지 약 20분 가량이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하여, 스마트폰의 모닝콜 알람을 당일 새벽 5시로 맞추어 놓았다. 오랜 만에 아내와 함께 떠나는 성지순례에 마음이 들떠서였는지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선 시간에 잠이 깨고 말았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침대에서 일어나기까지 남은 천금 같은 한 시간 동안 잠을 청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내 생각처럼 다시 수면에 빠져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흘러가는 시간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싶었는데, 4시55분경 벌써 일어난 아내가 나를 깨우는 바람에 5분 더 잘 수 있는 기회는 결국 무산된 채 눈을 떠야만 했다. 아내와 나는 서둘러 샤워 후에 옷을 갈아입고 부산을 떤 끝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서 5시20분경 내 승용차로 옥포 한화오션 매립지 주차장을 향해 출발할 수 있었다.

 

관광버스가 출발하는 주차장에는 성지순례에 참가하는 신부님, 수녀님을 포함한 성지순례 추진위원들과 많은 평신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며 각자가 탑승할 차량을 확인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세 대의 관광버스에 분승하여 목적지인 충청남도 청양군에 위치한 ‘청양 다락골 성지’를 향해 출발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공교롭게도 내가 탄 1호차에는 주임 신부님이 함께 탑승하여 운전석 뒤 맨 앞자리에 앉으셨다. 우리 차는 조용한 가운데 무거운 침묵의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차량의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은 진행자들이 모두에게 생수 한 병, 김밥 한 줄 그리고 포장된 간식거리를 나누어 주었다, 식사 전 기도와 함께 새벽에 나오느라 해결하지 못한 아침식사를 김밥과 생수로서 해결했다. 식사 후에 잠시의 침묵을 깨고 인솔자 역할을 하는 진행자가 마이크를 잡고 주도하여 모두가 함께 아침기도를 올린 이후 묵주기도 5단을 바쳤다. 이후 이곳 저곳에서 웅성거리며 신자들 간에 담소를 나누는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행자 측에서 미리 준비한 ‘성필립보 생태마을’을 운영하시는 황창연 베네딕토 신부님의 명강의 동영상 자료를 시청했는데 일행들로부터 때로는 박장대소가, 때로는 공감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우리를 태우고 6시10분경 거제도를 출발한 관광버스는 휴게소 서너 군데를 들러며, 4시간20분 만인 10시30분경이 되어서야 목적지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 다락골 성지’ 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버스에서 하차하여 잠시 걸어서 다락골 성지 성당 앞 무명 순교 십자가상이 있는 공터에 도달했다. 주임 신부님으로부터 성당에서 미사가 11시30분에 있을 예정이니, 잠시 자유시간을 갖고 11시15분까지 성전에 입장을 하면 된다는 공지가 있었다. 아내와 나는 45분 가량의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무명 순교자들이 안장되어 있는 산중턱 줄무덤 성지를 다녀오기로 했다. 산을 오르자 길목에 우거진 대나무숲을 배경으로 두 개의 무명순교자상 작품이 우리를 맞았다. 하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힘들어 하는 ‘죽음’이라는 주제의 조형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부활’이라는 주제의 조형물이었다. 나는 이 조형물들을 보면서 ‘사람이 태어나고 죽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선택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줄무덤 성지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있는데다 자잘한 돌멩이들이 깔리고 다듬어지지 않아, 자칫 발목이 접질러지는 사고를 당하기 십상이어서 조심스럽게 올라야 했다. 중간 중간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어서, 각 처마다 묵상과 기도를 하면서 오른다면 힘들이지 않고 산중턱에 있는 줄무덤 성지까지 오를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45분 안에 줄무덤 성지를 다녀와야 하는 시간적인 제약이 있었기에, 숨을 헐떡이며 가파른 산길과 계단들을 올라야 했다. 경사길을 오르기 힘들어 하던 아내는 뒤에서 내 허리띠를 붙잡고 따라 올랐고, 줄무덤 성지에 올랐을 때는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곳에는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탄압할 때 홍주감옥에서 순교한 교도들이 37기의 무덤에 매장되어 있었다. 무명 순교인들은 주로 가족 단위로 매장되어 있고, 당시 주위에 있던 10여 체의 인가는 모두 불태워 없애버려 흔적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었는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교우들이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들을 야밤을 틈타 관원들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빼내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하였다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야심한 밤에

은밀하게 그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들을 일일이 지게에 지고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험하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을 교우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와 아내는 이 줄무덤 성지 앞에서 무명 순교자들의 희생을 기리며 잠시 묵상을 했다. 묵상을 하면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하느님을 증거하고자 했던 순교자들의 신앙에 숙연해지고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만약 무명 순교자들과 같은 상황을 맞이했다면 “나도 그들처럼 용기 있게 목숨을 내어놓고 하느님을 증거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이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는 분명 성령께서 내려와 그들과 함께 하셨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보았다.

 줄무덤 성지를 뒤로하고 서둘러 산을 내려와 성당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오른쪽 연못에 수려하게 핀 예쁜 수련꽃의 환영을 받으며 다락골 성지 성당으로 입당을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오는 도중에 들었던 팔 없는 예수님 십자가상을 확인하려 제대가 있는 성전 앞을 보았다. 그 순간 팔 없이 몸통만 남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을 보고 순간적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 십자가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폐허가 된 독일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한 성당을 재건하던 도중에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의미는 청양 다락골 성지 팸플릿에서 찾을 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팔이 필요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들의 팔을 통해 모든 인류가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팔을 빌려주십시오!” 이 말씀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사가 끝난 시간이 12시20분이 지난 시간이라 시장했던 나와 아내는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성당 지하식당으로 내려가 길게 널어선 줄에 합류했다. 꽤나 넓은 식당의 공간 안에 배치된 자율 배식대에는 밥, 김치, 나물, 돼지고기 제육볶음이 놓여 있었고, 된장국은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자매님이 퍼서 주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이 평소보다 밥과 반찬을 조금 많이 퍼온 나는 일식삼찬에 된장국을 맛있게 먹다보니, 어느새 접시와 국그릇을 깨끗이 비워버렸다.

일행들이 주임 신부님의 인솔로 줄무덤 성지로 올라갔을 때, 이미 그곳을 다녀온 나와 아내는 성당 앞 십자가의 길 기도공원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상을 바치기로 했다. 우리 앞뒤로 기도를 하는 신자들이 많아서 마치 골프장의 홀을 라운딩 하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1처에서 시작하여 14처까지 십자가의 길 기도와 묵상을 마칠 수 있었다. 아내는 잠시 성물방에 들러서 유일하게 다락골 성지에서만 있는 팔 없는 예수님상의 묵주를 구입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아내로부터 내 세례명과 일치하는 빈첸시오 가톨릭 지갑용 패카드를 선물 받았다. 그런 연후에 우리는 성물방 옆 사무실 앞 스탬프가 비치된 곳으로 가서, 준비해간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의 72 페이지 청양 다락골 성지란에 순례일을 기록하고 확인란에 스탬프를 찍었다. 6월 초순이었지만 한여름처럼 더운 날씨라 햇볕이 내리쬐는 곳을 피해 그늘이 있는 쉼터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휴식을 취했다. 이때 우리 일행 중에 다리가 불편해서 줄무덤 성지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던 몇 분의 형제 자매님들을 만나 카페에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줄무덤 성지에서 일행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줄무덤 성지를 다녀온 주임 신부님과 수녀님을 포함한 일행들과 합류하여 잠시 버스를 타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이 태어나신 ‘새터 성지’로 이동했다. 그곳은 성지순례를 온 많은 신자들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계단을 올라 줄을 서서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출입통로가 좁아서 한 줄은 들어가고, 한 줄은 나오는 두 사람이 겨우 설 수 있는 통로를 통해서 ‘새터 기념경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제대는 큰 바위로 되어 있었고, 제대 위에는 천장에서 자연채광이 되는 동그란 큰 구멍을 통해서 밝고 경건한 빛이 내리고 있었다. 제대가 있는 정면 중앙 벽면에는 예수님 십자가상이 걸려 있고, 왼쪽에는 감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대 아래에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의자들이 두 줄로 가지런히 고정되어 있었고, 일부 순례객들은 그곳에 앉아 경건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나는 제대 위에 양손을 얹고 하루 빨리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시성이 이루어지길 조용히 기도하고 새터 기념경당을 나왔다. 새터 성지 계단을 내려와 다리를 건너 도로변 교통정리를 하는 성지 봉사자들의 통제에 따라 도로를 건너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이로서 청양 다락골 성지순례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우리 일행들은 귀가를 위해 거제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내가 탄 1호차를 필두로 2호차와 3호차가 뒤를 따라 출발을 했다.

 초여름 더위와 줄무덤 성지 산행으로 피곤했던 교우들은 올라올 때 앉았던 좌석에 앉아 휴식을 쮜하면서 올 때와 같이 황창연 베네딕토 신부님의 동영상 강의를 시청했다. 연휴를 맞아 하행선 고속도로가 올라올 때와 다르게 소통이 조금 원활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탄 버스는 큰 지체됨 없이 거제를 향해 달렸다. 진행자의 권유로 모두가 마이크를 돌려가면서 성지순례를 마치고 느낀 개인의 소감을 말하였다. 소감 발표가 끝나고 잠시 후 진행자들이 나누어주는 간식거리와 도깨비기름 성분이 든 소주와 캔맥주 그리고 돼지족발 안주로 인해 차내 분위기가 시끌벅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간식거리와 안주들은 몇몇 고마운 교우들의 빨랑카로 조달되었다는 진행자의 설명이 덧붙여졌다. 귀가차량 내에서 적당한 음주는 있었으나 관례적으로 이루어지는 광란에 가까운 노래방 경연대회 없이 조용한 귀갓길이 되었다. 첫 번째 휴게소에 버스가 잠시 정차했을 때 각 차량의 진행자들이 모여서 각자 차량의 분위기를 공유하는 기회를 갖는듯 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이후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 드디어 피해갈 수 없는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말았다. 진행자가 비장한 각오를 한 얼굴로 마이크를 잡더니 “성지순례 후 귀갓길에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의무사항입니다”하고 선포를 했다. 그리고 스스로 선곡 후 멋지게 노래 한 곡을 뽑자 많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부터 백지와 볼펜을 든 자매님이 좌석을 돌면서 신청곡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버스 안은 올라올 때 엄숙하게 기도하던 분위기와는 극명하게 달라져 순식간에 열창에 호응하며 모두가 손뼉을 치면서 즐기는 대형 노래방으로 바뀌어버렸다. 어쩔수없이 나도 선곡을 하고 가수 최백호가 부른 노래 ‘영일만 친구’를 열창해서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 신명 나는 노래방의 운영은 버스가 저녁식사를 하는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한적한 시골의 제법 규모가 있는 한 식당 앞에 도착했다. 아내와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수저를 놓고 식탁이 다 차려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 올라갈 때와 달리 다른 버스에 탑승하신 덩치가 큰 주임 신부님이 들어오시더니 내가 앉은 식탁 앞에서 나를 보고 멈추시고는 “빈첸시오 형제님,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하셨다. 신부님의 자리 선택을 승인해주는 위치에 있지도 않은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예, 신부님 앉으십시오!”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 신부님과 함께 들어온 내 대부께서 신부님의 옆자리에 앉으심으로써 나와 아내, 주임 신부님, 내 대부 네 사람이 겸상을 하게 되었다. 소고기 석쇠불고기와 쌈 채소, 밥 한 공기와 된장국을 포함한 몇 가지 반찬이 식탁 위에 차려졌다. 우리 네 사람은 식사 전 기도를 바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나는 주임 신부님과 성지순례에 관한 얘기도 나누면서 편안하게 식사를 마쳤는데, 아내는 주임 신부님과 겸상을 하게 됨으로써 조심스러움에 식사하는데 다소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일행 모두가 식사를 마치고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출발 후 두 곳의 휴게소를 거쳐서 저녁 8시30분경 우리가 출발했던 거제 옥포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일행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오후 4시경 캔맥주 한 개를 마신 것 외에 음주를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승용차를 운전하여 아내와 함께 9시가 다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성지순례는 순교자들의 흔적을 찾아 참배하고, 우리의 신앙심 고취와 더불어 나를 성화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신앙의 씨앗을 뿌리다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죄목으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감옥에 투옥되어 가산을 몰수 당하고, 배교를 강요하는 모진 고문을 이기고, 하느님을 증거하고자 초개같이 목숨을 던지고 순교의 길을 택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때 가혹한 박해를 받으며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 쓴 천주교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로마 교황청의 시성 절차가 매우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순교복자를 승인한 이유를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잘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한국 천주교회는 다른 나라와 달리 ‘신앙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평신도 중심의 자생적 교회’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4년 5월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직접 우리나라 여의도광장에 오셔서 순교자 103위 시성식을 거행하셨다.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이렇게 성대하게 시성식을 거행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현재 103위의 순교복자를 지니게 된 자랑스런 민족이 되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모두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가톨릭 신앙인들은 그 역사의 기반 위에서 오늘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 항상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선조 순교자들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며 선교활동에 적극 동참하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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