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안식일이었다(요한 5, 9)
들것을 들고 가라고 한 예수님의 명령은 유다인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날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되는 안식일이었다. 유다인들은 치유받은 사람에게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한 행위가 아님을 지적한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기를 고쳐준 분이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했기 때문에(5,11),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예수님께 책임을 돌린다. 그 대답을 들은 유다인들은 그런 명을 내린 예수님에게 적개심을 품고 박해하기 시작한다.(5,16)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여 안식일 법을 어긴 것도 나쁘지만, 그 병자를 부추겨 안식일 법을 어기게 한 것은 더 나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법만 아는 유다 지도자들
그런데 유다 지도자에겐 병을 고쳐준 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당신을 낫게 한 사람이 누구요?”가 아니라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요?”(5,12) 하고 묻는다. 이로써 유다 지도자들의 우선적 관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거동하지 못하다가 성한 몸이 되었다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유다 지도자들은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는 말대로 사람보다는 율법이 더 중요했기에 병자가 치유된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점에만 관심을 둔다.
이러한 모습은 마르코복음 3장에서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자, 바리사이들은 그다음 안식일에 일부러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하나를 회당에 데려다 놓는다. 이 사람을 고쳐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잡기 위한 책략에서다.(마르 3,1~6)
예수님은 이들을 ‘위선자’요, ‘눈먼 인도자’라 하시며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마태 23,24)이라고 비난하셨다. 이들은 온갖 종교적 행위와 믿음도 사랑과 연민의 마음 없이는 모두 헛되다는 사실(1코린 13,1~3)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지키기 위해 39가지 금지 규정을 정하고, 각 금지 규정에는 세부 조항들을 추가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안식일에 가능한 한 침을 뱉지 마라. 뱉은 침이 흙 부스러기를 동그랗게 만들었다면 안식 일에 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틀니 착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일 틀니가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떨어진 틀니를 집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정원을 거닐면 안 된다. 정원을 거닐다 벌레 먹은 이파리를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이파리를 따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여자들은 거울을 보면 안 된다. 거울을 보다가 흰머리가 보이면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뽑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용변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용변 행위는 냄새나고 더러운 것을 내보내는 것이기에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힌다.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수많은 규정을 정해놓고서 사람들이 제대로 지키는지 살펴보았고 지키지 않으면 단죄했다. 결국 안식일은 축복의 날이 아니라 악몽의 날로 바뀌었다.
바리사이들이 이렇게 조잡하고 비인간적인 세칙들을 만드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나가 니네베가 망하기를 바랐단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12만명이나 되는 사람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을 앞에 두고 애간장이 타는 하느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 또한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동생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가 왜 우는지, 왜 대문을 잠그지 않고 잠을 자는지 그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고 애태우는 마음이 없으면 잔인해진다. 제 아무리 진실과 정의를 외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자비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이의 아픔을 헤아리고 애타는 마음이 있다면 진심으로 생명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안다.
솔로몬 왕 앞에서 두 여인이 한 아기를 구도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할 때, 솔로몬은 그 아기를 반으로 잘라 한쪽씩 나눠 가지라고 했다. 그러자 한 여인은 저 여자가 아기의 엄마이니 아기를 주라고 애원했다. 차마 자기 아기를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아기를 포기한 그 여자가 바로 진짜 아기의 엄마임을 알아챈다. 세상에 어느 엄마가 자기 아기가 죽어 가는데 애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 書經』에 보면 “세상을 사는 데는 단지 서恕, 하나만 필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서恕는 마음 심心과 같을 여如로 되어 있다. 곧 상대방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인들도 안식일 규정을 세심하게 지키며 산다. 이스라엘에서는 안식일이 시작되면 일체의 교통 운행이 정지된다. 시내버스, 시외버스, 기차, 항공기, 선박 등 모두가. 단, 외국 항공기가 안식일 이전에 출발하여 안식일에 도착하거나 일시 기항하는 경우는 예외다.
열심한 유다인은 전기 스위치도 절대 손대지 않으며 전등이 켜져 있어도 끄지 않는다. 심지어 깜깜한 밤에도 불을 켜지 않는다. 전화를 걸지도 받지도 않고 인터넷도 사용하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회당이 아무리 멀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간다. 대부분의 사람이 금식하며 혹 식사를 한다 하더라도 설거지는 하지 않고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율법주의자
성경에 나오는 바리사이인들은 율법주의자들 같다. 그런데 바리사이들만 율법주의자들인 것은 아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신앙생활을 좀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일반인의 부정적인 인상은 남을 판단하기를(정죄하기를) 좋아한다는 것과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하나같이 율법주의자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법 또는 계명에 대한 순종, 불순종 여부로 따진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한다. 생명의 말씀인 성경으로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나오는 말씀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도리어 사람을 죽이고 병들게 한다. 또 세상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은 늘 기도하고 성체조배를 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하느님과 함께한다면서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단죄한다.
2) 법과 계명 준수 여하에 따라 축복과 재앙이 온다고 주장한다. 법과 계명을 잘 지키면 축복이 오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온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축복을 누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재앙을 겪는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병에도 안 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만사형통한다는 식의 논리다.
이러한 논리는 대단히 위험하다. 병에 걸리거나 시련을 겪는 사람은 단죄해 버린다. “아니, 그 사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왜 병에 걸렸지요? 믿음생활 잘하는 사람에겐 주님께서 병들게 하지 않으시지요. 필경 그 사람, 무슨 죄든 죄를 지었을 거요. 그러니 그런 몹쓸 병에 걸렸지.”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어도 병들 수 있고, 재산을 잃을 수 있고, 시련을 겪을 수 있다. 누가 바오로보다 믿음의 생활을 더 잘 한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한평생 가시에 찔리는 것 같은 병으로 고생했다.
3)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는 늘 ‘해야 한다’와 ‘하면 안 된다’사이를 오가며 산다. 상황에 따라 융통성이 필요할 때도 오직 엄격하고 경직된 율법의 적용만 있을 뿐이다. ‘해야 한다’와 ‘하면 안 된다’는 의무의 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니 내면에 참다운 자유와 해방은 생각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에게 신앙은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다.
4)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죄다. 법과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이유는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의 관심은 온통 죄가 되느냐 아니냐 뿐이다. 그러다 보니 행위의 본래 목적은 잊어버리고 결과적으로 죄에 사로잡혀 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죄에만 눈길을 두고 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죄인과 다를 바 없다. 전자는 신경증적으로 죄를 피하려 하고, 후자는 죄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다를 뿐이다.
죄에는 육체적인 죄와 영적인 죄가 있다. 육체적인 죄는 정욕, 탐욕, 폭음, 폭식, 게으름 등 욕구와 관련이 있고, 영적인 죄는 영혼과 관련이 있다. 오만, 교만, 타인에 대한 단죄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영적인 죄들은 육체적인 죄만큼 끔찍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교회에서도 영적인 죄에 대해서 징계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목자나 봉사자가 도덕적인 이유로 직책을 떠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것도 십중팔구 육체적인 죄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오만이나 교만 같은 죄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인 죄를 가장 미워하셨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죄를 지은 이들을 저주하지 않으셨지만 바리사이처럼 율법주의적 신앙에 빠져 영적 죄를 짓는 이들에게는 ‘위선자들, 눈먼 인도자들’이라 부르며 혹독한 저주를 하셨다.
바오로 사도도 마찬가지였다. 육체적인 죄를 지은 이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지는 않았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서는 “개들, 나쁜 일꾼들”(필리 3,2)이라 했다.
영적인 죄는 육체적인 죄보다 더 위험하고 더 파괴적이다. 그 까닭은 사랑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적 죄는 나쁘지만 그나마 죄 중에서는 가장 덜 나쁜 축에 속한다. 영적인 죄야말로 가장 나쁜 죄다. 남을 단죄하고 비난하는 죄, 선심을 쓰는 체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죄, 권 력을 즐기며 남을 깔아뭉개고 이용하는 죄가 가장 나쁜 죄다.
나의 인간적 자아는 내 안에서 다른 두 자아와 싸우고 있다. 하나는 동물적 자아고, 다 른 하나는 악마적 자아다. 둘 중에서 악마적 자아가 더 나쁘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만 교만에 빠진 위선자가 매일같이 육의 죄를 짓는 창녀보다 훨씬 더 지옥에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또한 율법주의적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간단하게나마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의 특성을 살펴보았지만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 율법주의적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 ‘나는 남보다 낫다.’ ‘나는 남보다 옳다.’는 도덕적 우월주의에 젖어 남을 판단하는 버릇이 있다.
우리에게 율법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은 본성상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잣대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잣대가 다르다.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멘스’란 말처럼 신앙생활에서도 같은 궤변과 독선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남이 손바닥만 한 성경책을 갖고 다니면 경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내가 갖고 다니면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이다. 기도회에서 남이 눈물로 기도하면 유별나기 때문이고, 내가 그러면 간절한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다. 남이 기도를 길게 하면 주책이고, 내가 길게 기도하면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남이 ‘주시옵소서.’하면 기복신앙이고, 내가 ‘주시옵소서,’하면 주님이 약속하신 바를 믿기 때문이다. 남이 사목위원이나 구역장 등 봉사직분을 받으면 ‘벌써?’라고 말하고, 내가 그러한 직분을 맡으면 ‘이제야’라고 말한다. 남이 평수가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가면 “주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데 저렇게 사치를 부리다.”하고, 내가 넓은 집으로 이사하면 “주님께서 나를 축복해 주셨다.”한다.
우리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 세상엔 나처럼 정상적인 사람과 남들처럼 비정상적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명목을 대든 간에 우리는 대부분 자기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다.
어린 딸이 엄마에게 흰 머리카락 몇 가닥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엄마, 흰머리는 왜 나는 거야?” 엄마가 대답했다. “그건 네가 뭔가를 잘못해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면 생기는 거야. 네가 한번 잘못하면 엄마 검은 머리카락 한 개가 하얗게 변하는 거지.” 이 말을 듣고 딸은 울먹울먹했다. 이런 딸을 보면서 앞으로는 엄마 말도 잘 듣고 더 이상 말썽도 부리지 않을 것 같아 속으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아이는 원망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할머니를 얼마나 속상하게 했으면 할머니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변했을까? 엄마는 도데체 어떤 사람이야?”
우리를 율법주의자로 만드는 교만
율법주의적인 사람들이 처음부터 따뜻한 마음이 없는 냉혹한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다.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사랑하며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 모두는 본성상 자기중심적이기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깨어 있지 않으면 우월감에 사로잡혀 율법주의자처럼 살 수 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자신을 율법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은근히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또는 판단하고 있다면, 그래서 “저 사람, 저렇게 하면 안 되지.”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더 낫지.”하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하느님은 그런 마음의 태도를 영적 교만으로 규정하셨고, 당신을 거스르는 적대 행위로 여기셨다. 천사들이 타락하여 사탄이 된 것은 교만 때문이었다. 그러니 영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픈 마음이 들 때마다 그런 우리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신앙의 이름으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 외에는 누구도 그렇게 할 권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