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풍속]
1. 성서의 풍속을 시작하면서 …
<평화신문, 694호부터(2002년 10월 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성당에서 친구들과 함께 성서를 공부한다고 모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특한 일이다. 물론 우리에겐 성서공부 교재도 없었고 성서를 가르쳐 줄 지도자도 없었다.
우리가 고작 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약성서 한 권씩 들고 와서 무작정 읽는 것이었다. 우리가 처음 읽었던 부분이 공교롭게도 최인호 선생이 ‘나코 복음’이라 이름 붙인 마태오 복음 1장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았으며…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그리고 다윗은 우리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고….”
성서에는 두 장이나 빼곡히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하는 이야기만 씌어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읽다 곧 지치고 말았다. 한 친구가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었다. “이게 뭐야, 뭐 이렇게 낳고 낳고 밖에 없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우리의 성경공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도대체 성서가 너무 어려워서 재미를 못 느꼈던 것 같다. 마태오 복음 서두의 족보가 복음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 건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후였다.
우리가 읽는 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지리, 풍습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성서를 읽고 묵상할 때 어려움에 부딪힐 때가 많다. 우리는 그 당시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아주 이해하기 어렵다(마태오 복음 13장 참조). 우리의 생각에 농부들은 먼저 쟁기로 땅을 갈고 그 다음에 씨를 뿌린다.
그에 반해 성서에 나오는 농부는 쟁기로 갈지도 않고 그냥 씨를 뿌린다. 당시에는 쟁기의 날이 밭고랑을 갈 정도로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흙 위에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시대의 씨 뿌리는 농부는 흙을 갈아서 씨를 뿌리지 않았다.
농부는 어디에 씨앗이 뿌려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씨앗은 가시덤불, 혹은 돌밭에 뿌려지기도 했다. 토양의 성질은 나중에야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비유는 우리가 말씀을 뿌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좋은 땅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또한 곡식을 맺을 수 있는 모든 땅에 희망을 갖고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는 우리와는 현저하게 다른 사고방식이나 생활 습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와 민족, 사회와 전통적인 풍습, 관례 등이 너무 달라서 낯설기조차 하다. 지리적인 위치와 기후 등과 같은 자연의 조건들도 성서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또한 성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글이다.
어쩔 수 없이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 시대의 풍속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서를 연구할 때 단어 사전 못지않게 풍물 사전도 필요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성서 시대의 풍속을 아는 것은 성서 공부를 더 재미있게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성서의 풍속을 통해 독자들이 성서에 흥미를 느끼고 성서를 이해하는 데 조그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시작한다.
2. 유혹과 지혜의 상징인 뱀
성서의 무대가 된 숲과 초원에는 많은 야생동물이 등장한다. 사슴과 토끼 같은 온순한 동물, 사자와 늑대 등 위험한 동물들이 성서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 아닐까.
그런데 고대인들에게 뱀은 영물이었고 죽지 않는 영생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이집트 파라오의 왕관에도 뱀이 머리를 치켜든 상징을 새겨 넣었다. 뱀의 모양은 그림, 조각, 부적이나 호신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대인들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뱀은 시체를 남기지 않고 겨울에 동면하고 봄에 허물을 벗고 거듭나는, 죽지 않는 동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뱀은 풍요와 다산, 불멸의 영원성을 의미했다.
성서에는 자주 뱀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특히 창세기에서 뱀은 하와를 죄에 빠뜨리는 유혹자로 등장한다(창세기 3,1-24 참조).
"하느님이 정말로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니?"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 묘한 질문이다.
"아니, 우리는 무얼 먹고 살라고?" 하는 생각을 유도해낸다.
대화를 주도하던 뱀은 결정타를 날린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죽지 않고 눈이 밝아진다. 하느님처럼 된다."
온갖 달콤한 말로 온통 여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뱀은 사라졌다. 이제 선택의 카드는 여자에게 넘어갔다. 여자는 이미 눈이 어두워졌다. 결국 여자는 먹음직한 열매를 따먹게 된다. 선악과와 뱀에 관한 이야기에서 뱀은 지상의 모든 동물 중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놈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모세 이야기에서 구리 뱀은 구원의 상징으로 쓰인다(민수 21,4-9 참조). 이스라엘 사람들은 호르산을 떠나 홍해바다 쪽으로 가면서 야훼와 모세에게 경솔하게 불평을 했다.
"우리들을 이렇게 사막에서 굶겨 죽이려고 이집트 밖으로 내몰았습니까?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잖아. 차라리 옛날이 낫지. 이게 뭐야?"
그러자 야훼 하느님은 불뱀을 보내어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었다. 그러자 백성은 모세에게 찾아와 용서를 빌며 야훼께 기도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대로 구리뱀을 만들어 그 뱀을 바라보는 자들은 소생할 수 있게 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라!"고 가르치신다(마태 10,16 참조). 예수님은 뱀을 지혜의 상징으로 소개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뱀이 교활한 존재인 동시에 신중과 지혜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뱀은 성서에서 이중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징그럽다고 하는 뱀이 또한 정력 강장제로 인기(?)가 높은 것은 인간이 가진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스스로 나타낸다.
성서에 나오는 뱀에 관한 상대적인 평가는 바로 우리에게 이런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에 어떤 것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고 변한다. 오늘 나쁜 것이 내일은 좋을 수도 있다.
3. 나그네를 환대하는 유다인의 관습
오래 전부터 지중해 주변 지역에서는 나그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커다란 미덕이었다. 유다인들에게도 손님 환대는 특히 중요했다. 유다인들은 낯선 사람이 마을을 찾아오면 일일이 돌아가면서 대접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위선에 가까울 정도로 나그네를 후대하는 바람에 부담이 되기도 했다.
예수님은 이런 팔레스타인 지역의 풍습 때문에 제자들에게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대접을 받지 말도록 미리 지시하셨다.(마르 10장 참조) 사람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잡담이나 경솔한 행동이 따르게 될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성서에서는 자주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율법의 중요한 규정으로 소개된다. 유다인들은 보통 여섯 가지 덕목을 최고로 여겼다. 손님을 환대하는 것, 병자를 문안하는 것, 하느님께 기도하고 명상하는 것, 율법을 열심히 배우는 것, 아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 이웃의 좋은 점만을 보는 것 등이다. 그 중에서도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관습을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된다.(창세 18장 참조)
아브라함은 어느 날 자신 앞에 나타난 전혀 모르는 나그네를 자기 집에 모셔 후한 대접을 했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지나가는 나그네 세 명을 보고는 뛰어나가 땅에 엎드린다. 인사를 할 때 무릎을 꿇고서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서서히 몸을 굽혀 인사를 하는 것은 근동의 특별한 인사법이다(창세 48,12 참조). 극진하게 손님을 접대하는 풍습을 드러내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오히려 나그네들에게 간청하다시피 말했다.
"손님네들, 물을 길어올 터인데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쉬어가십시오. 요기도 하시고 피곤을 푸신 뒤 길을 떠나십시오."
손님을 맞아들인 아브라함은 빵을 굽고 기름진 송아지를 잡아서 극진히 대접했다.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아브라함도 같이 먹은 것이 아니라 그들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한 것은 하느님께도 후한 대접을 해드린 것과 같았다.
왜냐하면 성서는 야훼 하느님이 나그네 세 사람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잘 대접해서 결국 하느님께 큰 상급을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선 예로부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병든 이들 등을 보잘것없는 이들로 꼽았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단순히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천사들이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이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히브 13,2).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서, 또 어떤 사건을 통해서, 손님으로 오신다고 보았다. 그들에게는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단순한 애덕 행위가 아니라 신앙 실천이었다. 나그네를 하느님의 천사로 생각해 극진히 대접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과거엔 우리나라에도 나그네를 잘 대접했던 좋은 풍습이 있었다. 정감 있는 인간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도움과 관심을 바라는 나그네들을 도처에서 만난다. 천사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생각해 본다.
4. 유다인의 결혼 : 결혼하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다.
라헬은 어느 날 남편 야곱에게 말한다. "내가 당신의 자식을 낳게 해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난 콱 죽어버리겠소."(창세 30,1참조) 왜 유다인들은 자녀 출산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당시에는 요즘처럼 사회 보장 제도가 따로 없었다.
그러므로 노인들을 책임지고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젊은 자식들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녀는 일종의 인생의 보험과 같았다. 그래서 젊은 남녀가 가정을 이루어 건강한 자녀를 낳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 중에서도 가장 큰 축복이었다.
탈무드에는 "아내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즉 결혼을 하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만큼 유다인들은 결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은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창세 1,28참조) 유다인들에게 결혼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자녀의 출산에 있었다. 성서에 보면 유다인들이 자녀에 대해서 갖고 있던 집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해 한 몸을 이루며 자식을 낳고 번성하는 일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해된다.(창세 1-2장 참조) 그래서 남녀의 결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요,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한 남자의 군대 징집을 1년 유예함으로써 결혼과 가정을 사회 복지 차원에서 보호했다.(신명 20,7 참조)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결혼에서 여자는 아버지의 결정을 절대적으로 따랐다.
그러나 결혼은 어떤 경우에도 여자의 동의가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또한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형의 아내, 즉 형수와 결혼하는 제도가 있었다.(창세 38,8참조) 실제로 이런 관습이 고대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의 근본적인 목적도 가문의 대를 잇는 데 있었다.
그런데 유다인들에게 결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남자가 어떤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맞이하려면 선물을 주거나 계약서를 써 주어야 했다. 가끔 동거에 의해서도 성립되었지만 그 남자는 채찍을 형벌로 받아야 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한 남자의 결혼 상대자가 된 여자는 그의 아내로 인정을 받았다.
율법에 따르면 남녀가 닫힌 방에서 여자는 세 살, 남자는 아홉 살부터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이처럼 당시 여성들은 집안의 엄격한 눈총 덕분에 외간 남자와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기란 쉽지 않았다.
결혼이란 남녀 사이의 문제뿐 아니라 결혼 당사자들이 속한 두 집안, 그리고 그 집안과 연관된 가문의 주요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대개 중매라는 안전한 방법을 택했다. 중매를 통해서 혼례를 치를 경우에는 결혼 상대의 집안 배경을 미리 파악하는 것 이외에도 원하는 배우자의 기준에 따라서 대상자들을 접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중매로 결혼하게 된 신부는 혼례 일까지 시댁이나 신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혼식 당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신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로서는 남녀가 만난 적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매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사악과 리브가 부부였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위해서 자신의 종을 고향에 보내어 며느릿감을 구하게 했다.(창세 24장 참조) 둘은 결혼 전까지 한번도 서로 얼굴을 맞댄 적이 없었다. 이사악은 종이 데려온 리브가를 천막으로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사랑도 뒤따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중매 결혼은 예수님 시대에도 여전했고, 로마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이었다.
그러나 성서를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뚫고 뜨겁게 연애한 남녀의 일화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야곱과 라헬(창세 29, 20참조), 비극으로 끝난 세겜과 야곱의 딸 디나(창세 34,3참조), 삼손과 블레셋 여인(판관 14,1-3), 다윗과 바쎄바(1사무 11장 참조)의 이야기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여러 가지 편견과 역경을 뚫고 매력적인 상대와 뜨겁게 사랑을 나눈 사례에 속한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의 뜨거운 사랑만큼은 법이나 제도, 관습으로도 막을 수 없었나 보다.
5. 이혼에 관한 풍습
"월요일은 참으세요." 법원에 이혼하러 오는 부부가 월요일에 가장 많다고 한다. 아마도 주말 동안 부부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이혼율도 자꾸 늘어나 세계에서 상위권이라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가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밖에 나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참조)
고대 사회에서 남자는 별로 어려움 없이 그의 아내와 이혼할 수가 있었다. 또한 이혼의 경우에 있어서 주도권은 항상 남자에게 주어져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아내가 심각한 질병을 앓거나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이혼의 사유로 여자가 '수치스런 일'을 행했을 경우만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랍비 힐렐(Hillel)은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경우인 '수치스러운 일'을 임의적으로 넓게 해석하여 사소한 일을 가지고서도 아내를 충분히 추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아내가 요리를 잘못했거나, 말대꾸를 하거나 단순히 자기 아내보다 다른 여자가 더 마음에 드는 경우에도 이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랍비 샴마이(Schammai)는 간음과 나쁜 행실만을 아내 추방의 원인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서의 이혼규정은 본래는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점차 남자들의 권리를 행사하는 편리한 도구로 변질되었다. 남자는 남성 위주의 결혼 법을 통해 성적 방종이 허락되었고, 여성은 남자가 버리거나 취할 수 있는 소유물로 전락했다.
간단히 이혼장만 써 주면, 남편은 자기의 아내를 내쫓을 수가 있었다. 아내를 추방하는 형식도 간단하였다. 남편은 "너는 더 이상 나의 아내가 아니다"라는 선포와 함께 이혼장을 써주면 이혼이 성립되었다. 여자는 이혼장을 근거로 다시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가 있었다(신명 24,2).
반대로 남편의 권리는 율법에 의해서 겨우 일부만 제한되어 있었다. 자기의 아내가 싫어져서 결혼할 때 처녀가 아니라고 부당하게 허물을 뒤집어 씌워 고발했을 경우 진실이 밝혀지면 남편은 장인에게 벌금을 물고 평생동안 결코 그 여자를 추방할 수 없었다(신명 22,13-19).
또한 처녀를 강간했다가 꼼짝없이 결혼하게 되었던 남편도 아내를 추방할 수 없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이혼 풍속은 절대적으로 남성 중심적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여자 편의 잘못으로 이혼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위자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여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여자는 이혼 당할 때, 지참금은 물론 자녀의 양육비와 자신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경비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위자료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도 일반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추방할 때 재정적인 대가를 치렀다. 일반적으로 이혼할 때 남편은 아내에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부인은 자기가 시집올 때에 가지고 온 모든 것들을 가지고 남자의 집을 나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신약성서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혼에 대한 엄격한 금지를 가르치신다(마태 5,31-32). 이혼에 대한 금지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보호와 사랑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혼장을 써주고 결혼을 파기하려는 남자들의 자기정당화를 공격하신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은 독자적 생존을 위협받았다. 예수님은 가부장적인 질서가 지배하던 시대에 남성 중심의 결혼 법에 맞서 이혼을 금지함으로써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려 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혼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근본적인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이혼금지는 당시의 절대적인 약자였던 여성과 어린 자녀들에 대한 보호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한 금지가 아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결혼은 육체적인 결합보다도 더 인격적인 결합을 강조하신 것이다. 또한 결혼한 부부는 인격적인 사랑 안에서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그래서 결혼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고 부여하신 것이기에 어떠한 이혼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결혼이란 단순히 남녀의 인간적인 선택과 행동을 넘어선 거룩한 행위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6. 할례는 하느님 나라의 주민증?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초창기에는 유다교의 영향으로 개종의 전제 조건으로 할례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당신들이 세례를 받으려면 할례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무슨 소리야, 우리가 유다인도 아닌데 왜 할례를 받아야 해…."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교의 복음 전파에서 유다인의 율법이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은 유다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것을 결의했다.(사도 15장 참조) 그래서 교회는 사도회의의 결정 이후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이 자유롭게 세례를 베풀 수 있었다.
할례는 오늘날의 포경수술과 같은 것으로, 매우 오래 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이었다. 할례는 보통 성인식의 통과의식으로 시행되었다. 할례를 베푸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할례는 신들에게 바치는 피의 제물이라는 것, 고통을 견디는 수단, 결혼의 준비, 위생상의 이유, 혹은 생명을 준 신에게 남성을 보상하기 위해 바치는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할례가 본래는 일반적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의식이며, 결과적으로 종족의 공동생활에 들어오는 의식이었다. 이런 의미는 오늘날에도 할례를 행하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종족들에게 그대로 나타난다. 이 관습이 이스라엘에서도 처음에는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는 결혼생활을 위한 통과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할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종족이 가나안땅에 들어온 다음부터 시작한 풍속으로 보인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표시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후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할 것을 명령하고, 이것을 어기는 자는 계약을 깨는 사람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희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너희와 나의 계약의 징표이다."(창세기 17장 참조) 할례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언약의 표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었다. "너는 내 것이다. 나는 네 하느님이 되고 너는 내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징표, 상징이었다. 이제 할례는 일종의 하느님의 자녀라는 증명서, 즉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 되었다. 이처럼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할례를 자랑했고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과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였다.
할례를 집행할 때는 칼과 같이 날카로운 돌칼을 이용했다. 할례의 집행자는 아버지였으며(창세 21,4),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어머니가 아들의 할례를 행하였다.
출생 직후에 할례를 행하게 되면서 결혼 시작의 예식이라는 의미는 퇴색되었다. 할례의 의식은 이제 종족의 생활, 곧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서 같은 집단의 성원이 되었다는 것을 표시하게 되었다(창세 34,14 이하; 출애 12,47 이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의 종교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 속에서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모세 오경의 율법들은 할례에 관하여 부수적으로만 언급하고 있다. 바빌론 유배 기간에 와서야 비로소 할례가 이방인들과 구별되고, 이스라엘과 야훼에게 소속된 자의 특징이 되었다.
할례는 신약의 세례성사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마음의 율법을 강조하셨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지보다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요,
또한 하느님께서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징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평화신문, 제700호(2002년 11월 1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7. 유다인의 장례 풍속
유다인들은 지금도 죽은 다음에 예루살렘에 있는 올리브 산에 인접한 기드론 골짜기의 경사진 지역에 가장 묻히고 싶어 한다.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올리브 산에 내려와 공동묘지의 중앙의 길을 통과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집트 왕들의 묘지인 피라미드는 모두 나일강의 서쪽에 세워졌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해가 지는 서쪽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이란 영혼이 몸을 떠나 새로운 영원의 세계로 가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에게는 이 세상의 삶보다 영원한 죽음 뒤의 세계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집트의 왕들에게 평생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자신들의 묘지인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영원한 세계에서 만일 육체가 훼손되면 정신과 재결합할 수 없게 된다고 믿어 시신을 약품으로 방부 처리하여 미이라를 만들었다. 죽은 시신도 사후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눈을 감기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사후 세계를 신성시하거나 죽은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인간이 죽게 되면 땅 밑에 거처하다 종말이 되면 하느님 앞에 불려 나와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다. 유다인들에게 죽음은 여기서 결코 소멸이 아니다. 육체가 현존하고, 최소한 뼈들이 아직도 현존하는 동안에 영혼은 극도의 허약한 상태에 있을 뿐이었다고 믿었다(욥 26,5 참조).
죽은 사람의 영혼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력도 끼칠 수 없지만 자신의 육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느낀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 때문에 유다인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시신을 소중히 다루었고, 예를 갖추어서 장례식을 치르는 일을 미덕이자 선행으로 받아들였다. 장사를 치르지 못해 들에 방치되어 공중의 새나 들짐승에게 뜯어 먹히도록 버려지는 것을 가장 큰 저주로 생각했다(1 열왕 14,11 참조).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게 되면 반드시 24시간 안에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신명 21,23 참조).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될 수 있으면 빨리 흙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창세 3,19 참조). 그래서 시신을 무덤에 안치할 때 세마포로 싸거나 나무 관을 이용한 것도 시신이 빨리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런 조기 매장 풍습에는 팔레스티나 지역이 매우 무덥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작용했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숨을 거두게 되면 임종을 지키던 아들이 직접 두 눈을 감겨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이 내세로 들어가는 길을 볼 수 있게 눈을 감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던 이집트의 풍습과는 전혀 달랐다. 죽은 시신에 입을 맞추기도 하는데(창세 50,1), 이런 풍습은 지금도 중동 지역에 남아있다. 눈을 감기고 난 뒤에는 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처럼 시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물로 깨끗이 닦아주고, 냄새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향료를 발랐다(루가 24,1).
그리고 유다인들은 임종시에 몇 가지 절차에 따라서 그 슬픔과 고통을 나타냈다. 먼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면 그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을 찢었다(창세 37,34). 옷을 찢고 난 후 상을 당한 이들은 누구나 굵은 삼베로 허리를 묶고 재나 흙을 머리에 뿌렸다. 죽은 이에 대한 슬픔과 그 마음의 아픔이 극심하다는 의식적인 표현이었다. 그리고 시신 앞에서 가족이 가슴을 치면서 눈물 흘리고 곡을 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창세 37,35). 이 곡소리는 상당히 컸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 곡소리를 듣고서 초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도 했다. 또한 가족이 흘리는 눈물은 작은 병에 따로 모아두었다가 시신과 함께 무덤에 안치하기도 했다(시편 56,9).
시신은 땅에 매장하거나 동굴을 묘지로 사용했다. 동굴 묘지는 입구 바닥에 홈을 파고 둥근 돌로 가로막아서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다. 장례식은 무덤의 입구를 닫고 인봉을 한 뒤에 회칠을 하는 것으로 모두 끝났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곡은 대개 30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유족들은 사흘 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유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흘이 되어서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고 나흘째부터 시신이 부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명절이 돌아오면 가족의 무덤을 찾아가 다시 회칠을 해서 깔끔하게 단장했다.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인 죽음은 시공을 초월해서 인간의 가장 큰 슬픔이라 할 수 있다.
죽음과 이별에 대해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행위이다. 비록 민족과 나라마다 관습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마음은 모두 같은 것이리라.
<평화신문, 제701호(2002년 11월 2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8. 유다인의 겉옷과 허리띠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면서 겉옷에 대해 언급한다.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마태 5, 40참조)
예수님의 이 설교를 들은 당시의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수군거렸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 속옷을 달라고 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겉옷을 주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겉옷의 의미는 특별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겉옷이란 당시 사람들이 입었던 외투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유다인들은 속옷과 겉옷을 입고 허리띠를 띠고 샌들을 신었다. 팔레스티나 지역은 대체로 일교차가 무척 심하다. 낮에는 기온이 상당히 높이 올라가서 한 여름에는 40도를 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습기는 많지 않아 그늘에 들어가면 금새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기후이다.
그러나 밤이나 겨울이 되면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에 두툼한 옷을 입고 모닥불을 피워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기후가 이렇다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겉옷인 외투가 필수였고, 겨울이 되면 옷을 여러 벌 겹쳐 입기도 했다.
대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겉옷은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긴 띠처럼 생긴 옷감으로 폭이 2-3m정도의 외투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염소 털로 조악하게 짜서 만든 겉옷을 입었다. 가난한 이들은 이 겉옷을 잠잘 때 이불로도 사용했다. 그래서 율법에 따르면 겉옷을 담보로 잡아도 해질 때까지는 반드시 돌려주어야 했다.(출애 22, 26-27참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행하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의복은 주변 여러 나라들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다. 이스라엘 남성들의 복장은 대대로 거의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었다. 내복은 가벼운 옷감으로 만들고 겉옷은 무겁고 따뜻한 옷감으로 만들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외출복은 확연히 구별되었다. 부자들은 훨씬 더 좋은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다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 외투를 입고 예를 갖추었으며, 돈이 있는 사람은 외투의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여러 벌을 마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거리로 삼기도 했다. 겉에 입는 외투는 워낙 비싸다 보니 사정이 어려운 이들은 한 벌을 가지고 가족 전체가 돌려 입거나 담보로 잡힌 채 돈을 빌리기도 했다. 이처럼 근동지역에서는 여러 벌의 겉옷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유한 사람의 척도가 되었다. 따라서 겉옷이 많은 사람은 부자이고 능력이 많은 사람임을 나타내주며, 겉옷이 적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임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또한 유다인 남자들은 이 겉옷의 가장자리를 자줏빛 끈으로 장식했다(민수기 15,38참조). 유다인들은 옷 술을 만들어 그것을 볼 때마다 하느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자신을 일깨웠던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의 옷 술을 크게 하여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주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 했다.
그리고 겉옷에는 항상 허리띠를 매야 했다. 허리띠를 사용함으로써 풍채와 외모가 좋아 보이도록 하고 길어서 흘러내리기 잘하는 긴 외투가 일상 활동이나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했다. 허리띠는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허리띠의 길이가 부의 수준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부자들은 2층 건물 높이에 해당하는 긴 허리띠를 매고 다니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허리띠에 구멍을 내서 돈이나 귀중품을 넣고 다니기도 했다. 또 전쟁에 나갈 때는 허리띠를 이용해서 무기나 도구를 허리에 차거나 전투 시에는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성서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말은 '대비하다' 혹은 '정신을 바짝 차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반대로 허리띠를 푸는 것은 게으름을 피우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사람들이 당황했을 예수님의 말씀, 즉 "누가 소송을 제기해서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마저 내어 주라!"는 주님의 참된 교훈은 복수는 복수를 낳기 때문에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함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복수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무저항을 넘어서는 적극적 용서와 사랑이라는 것이다.
물론 악한 자에게 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라는 가르침에는 불행한 자를 굽어보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신뢰가 그 배경이 된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결코 패배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인생의 진정한 승리를 이루는 해결책을 보여주신 것이다. <평화신문, 제702호(2002년 12월 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9. 이스라엘 남자들의 최고 신부감
얼마 전 신문에서 남성들이 결혼할 때 여성의 미모를 능력이나 성격보다 앞에 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젊은이들의 외모지상주의가 내용보다는 겉 꾸미기에 급급한 요즘의 세태를 반영한 것 같아 씁쓸하다. 또한 젊은이들은 결혼은 무엇보다 현실이라 생각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것을 결혼의 우선 조건으로 고집한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배우자 감으로 남성은 능력과 직업이, 여성은 미모와 집안이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중국 산서성에서는 뚱뚱할수록 일등 신부감이라고 한다. 이 지방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신랑이 신부를 맞기 위해서는 신부 댁에 돈을 내야 하는데 체중이 무거울수록 그 금액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의 처녀들은 많이 먹어서 가급적 뚱뚱해지려고 애쓴다. 뚱뚱한 여성일수록 건강하고 일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젊은 남녀들의 배우자 감 선호도는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그 기준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좋은 아내를 얻고자 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서 갖는 모든 남자들의 공통된 희망일 것이다.
"훌륭한 아내를 가진 남편은 행복하여라, 그는 곱절은 오래 살리라."(집회 26,1) 훌륭한 아내를 가진 사람은 장수의 행복도 누린다는 것이다. 남편에게 가장 큰 기쁨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아내와 함께 오래오래 사는 것이다. 곱절로 오래 산다는 표현도 부부의 화합이 건강의 샘이며 좋은 아내는 남편의 건강을 늘 잘 보살피기 때문일 것이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가정 안에서의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인생의 최고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남성들은 자신을 위해 '일생 동안 악의 없이 선한 삶을 살아줄 완전한 아내'를 찾고 싶어한다.
성격이 포악한 아내나 싸우기 좋아하는 성격 고약한 여자를 아내로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완전한 부인'이 되려면 어떤 자격조건이 있어야 했을까? 어떤 점을 가진 신부를 최고의 며느리 감으로 꼽았을까?(잠언 31장 참조)
요리와 바느질을 할 줄 아는 아내, 농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더 중요한 일에 시간을 보내는 아내, 그리고 무엇을 꼭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사업에 대한 식견도 있으며 지혜롭게 사고 파는 방법을 아는 아내를 좋은 아내로 꼽았다. 그러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주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하느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갖고 남편에게 ‘알맞은 조력자’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아내가 훌륭한 아내이다.
성서는 반대로 좋지 않은 아내상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 부인이 바가지 긁는 것을 남편 머리에 빗방울을 계속 떨어뜨리는 것으로 비유했다(잠언 19, 13).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잠언 21,19)고 하면서 아내의 부드러운 성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입이 험하고 수다스러운 아내는 진군을 알리는 나팔과 같아서 이런 여자와 사는 남자는 전쟁의 와중을 헤매는 것과 같다."(집회 26,27)
어리석은 아내에 대해서도 많은 언급이 있는데 특히 말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즉 수다스럽고 험한 말을 하며, 사람들 사이에 이간질을 하는 아내는 결국 자신의 남편에게 고통과 피해를 안겨주기 마련이다.
아내의 정숙함이란 우선 말과 행동에서 나타난다. 어리석은 아내는 혀를 잘못 놀려서 재앙과 불행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좋은 아내는 큰 행운이다.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이 행운을 받는다."(집회 26,3) 성서에서 지혜롭고 정숙한 아내란 아름다운 용모와 착한 품성, 교양 있는 말과 행동, 자제력을 갖춘 여인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아내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주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이 행운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경외함이 좋은 아내를 얻는 길이 된다. 요즘의 젊은이들이 너무 외적인 조건에 집착해서 배우자를 고르는 세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차피 외모는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성격이나 천성은 웬만해서 바뀌기 어렵다.
이혼의 사유가 예나 지금이나 '성격 차이'가 제일 많은 것은 한번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고 좋은 아내나 남편을 얻기를 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좋은 남편, 아내가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평화신문, 제703호(2002년 12월 8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10. 하느님의 축복과 풍요의 상징 올리브 나무와 기름
예수님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시기 전에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39-46참조)
올리브 산에서 하셨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장면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때가 예수님의 생애 중에 가장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순간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수님도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셨을 것 같다. 지금도 예수님이 기도를 하셨다고 추측되는 동산에는 오래된 여덟 그루의 올리브나무가 있다. 물론 나무의 나이는 확실치 않다. 몇몇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이 올리브나무들은 적어도 약 2000년은 됐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 학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 고뇌의 밤을 이 나무들 곁에서 기도하며 보내셨을 것이다. 그래서 올리브 산 아래 위치한 겟세마니 동산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특별한 감동을 주는 성지이다. 현재도 이 동산은 예수님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올리브나무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더불어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한 과일나무이다. 올리브나무는 척박한 토양과 소량의 물만으로도 튼튼한 잎을 피운다. 그래서 올리브나무는 영혼을 치유하는 나무로 불리며 지중해의 환경과 문화에 잘 어울려서 수 천년을 산다.
올리브 나무는 줄기에 마디가 많고 잎은 은빛으로 반짝인다. 올리브나무는 늘 푸른 나무로 5월에 작은 흰색 꽃이 피고 나무의 열매는 가을에 수확해서 식료품, 연료, 목공품, 의약품 등 일상 생활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됐다.
"비둘기는 저녁 때가 되어 돌아왔는데 부리에 금방 딴 올리브 이파리를 물고 있었다."(창세기 8,11 참조) 그리고 하느님의 귀한 축복은 올리브나무에 비유되기도 하였다.(호세아 14,6-7) 이처럼 올리브나무는 매우 귀하고 유용하였기 때문에, 나무들 중 왕으로 생각했다. 올리브나무는 평화를 상징하기도 했다.
또한 올리브나무의 열매에서 나오는 올리브기름은 여러 용도로 쓰였다. 팔레스티나 지방은 아열대에 속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매우 건조하고 태양과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몸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목욕을 하고 나면 몸에 올리브기름을 발랐다. 또 올리브기름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으며 시체를 매장하기 전에도 사용했다.(루가 23,56) 특히 올리브기름은 음식에 많이 쓰이고, 등잔기름, 약, 향수, 비누의 재료 등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쓰였다.
성서에 보면 올리브기름을 바르는 것은 기쁨의 표시였다. 주인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었다.(마태 26,7; 루가 7,46). 올리브기름에 향료를 넣어서 향유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최고의 환영의 표시로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바르기도 했다. 손님의 발에 기름을 발라 주는 것은 헌신과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루가 7,28-46 ; 요한 12,3) 그러나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은 기름을 바르지 못했다.(2사무 14,2)
또한 올리브기름과 향유는 종교 의식에서도 기름을 바르는 도유에 사용되었다. 성서에 보면 특별한 직무에 축성할 때 올리브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으로 사용했다. 이처럼 도유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세속의 영역에서 성스러운 영역으로 인도함을 의미했다.
사제, 왕, 예언자 등의 임명식에는 향유를 온몸에 발랐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이제 수행해야 할 소중한 사명의 준비로, 그들의 몸과 마음에 힘을 실어주는 의식이었다. 왕의 즉위식에서도 고위 성직자와 예언자가 기름을 바르는 도유식이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 세워지며, 하느님의 특별한 가호 아래 놓이게 된다고 믿었다. 이처럼 올리브기름은 '하느님 생명의 풍요와 충만'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세례를 받을 때 이마에 도유를 받는다.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올리브나무와 기름처럼 세상 속에 하느님의 축복과 풍요, 그리고 이웃에게 유익함을 전해줄 수 있는 삶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하겠다.
<평화신문, 제704호(2002년 12월 15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11. 유다인의 머리카락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의 머리색과 모양은 아주 다양하고 독특하다. 오늘날까지 머리카락은 자신을 표현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때로는 머리카락이 그 사람의 사고방식, 문화, 그리고 종교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젊음의 일반적 상징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머리카락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다.
가장 오래된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도 탈모 치료에 대한 방법이 기록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집트 시대에 파라오의 아들들은 바로 귀 뒤쪽 머리의 오른쪽 편 위에 독특하게 머리를 쪽매어 다녔다고 한다. 또한 파라오들은 절대 가발을 쓰지 않고는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고대사회에서 머리카락은 마치 옷이나 보석처럼 사회적, 종교적 지위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영국에서는 법원의 판사들이 마치 말갈기 모양의 가발을 쓰고 재판을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로 가발은 18세기 중반까지도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머리카락은 중요하고 상징적 역할을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수도사들은 정수리까지 머리를 잘라서 삭발을 했다. 수도사들에게 있어서 삭발은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순결성을 표현한다. 또한 삭발은 자신들의 맹세를 선언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삭발은 세상일에 대한 허무함과 부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헌신적 봉사를 의미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의 그리스도교도 세속적 것보다는 삶의 정신적 측면에 대한 관심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수도사들의 삭발은 아주 엄격하여 성직위계를 받자마자 거의 머리카락 전체를 다 자르거나, 머리 주위에 머리카락을 조금만 남겨두는 전통이 계속되었다. 오늘날 수도자들이 머리를 가리는 것도 이런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구약시대에도 외모를 가꾸는 데 머리카락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특히 아시리아인들은 불에 달군 쇠로 머리카락에 온갖 웨이브를 시도했고 머리 염색 기술도 대단히 발전했다고 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금발이 유행해서 사람들은 금발 염색을 해서 한껏 멋을 부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경우에는 검은 머리를 선호해서 머리카락을 까맣게 염색하기도 했다. 유다인들도 남녀 모두 길고 검은색 머리를 좋아했다. 특히 노인들의 백발은 영광의 대상이 되었다(잠언 20,29).
구약시대에는 긴 머리카락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다. 삼손의 이야기는 머리카락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삼손의 연인 들릴라가 불레셋의 영주로부터 보화를 받고 삼손의 머리카락을 자르게 된다.
삼손의 엄청난 힘의 원천은 바로 머리카락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삼손은 머리카락을 자르자마자 힘을 잃고 적에게 잡히고 만다(판관기 16장). 이처럼 유다인들은 머리카락이 힘의 원천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삼손과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우아하고 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2사무14,25-26).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으로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짧게 깎는 것이 유행이었다. 남자가 여자보다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유다인들이 머리카락을 자를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우선 머리카락 전체를 완전히 삭발할 수 없었다. 상을 당한 사람이나 병에서 회복된 사람 이외에는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완전히 밀어버릴 수 없었다(신명 14,1). 머리카락을 자르는 시기도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풍습은 유다인과 다른 종족을 구분하려는 목적과 함께 머리카락에 대한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은 일부를 잘라내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계속 자라는 신체의 부분이다. 또한 머리카락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자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머리카락에 어떤 능력이나 특별한 힘의 원천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유다인 중에도 수염을 깍지 않고 귀 바로 위의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고 꼬아서 기르는 풍습을 자랑스럽게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유다인들은 머리카락이 없는 대머리를 가진 이들을 업신여기고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간주하기도 했다(2열왕 2,23). 또한 유다인들은 머리카락이 빠지면 피부병과 문둥병에 감염되었다고 생각했다(레위 13,40-44참조).
<평화신문, 제705호(2002년 12월 22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12. 장애의 원인은 그 사람의 죄?
조선시대 명종 때 정승이었던 상진(尙震) 대감은 발을 저는 절름발이를 보면 "저런, 저 사람 한 다리가 좀 길구먼" 했다고 한다. 짧은 다리를 보지 않고 긴 다리를 봄으로써 그 사람을 낙관적이고 긍정적 관점으로 본 것이다.
'장애인'이란 한마디로 몸이나 마음이 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몸이나 마음이 성하지 못하고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성서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사람들에게 장애현상이 생기면 이는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해 하느님이 주신 벌로 이해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벌하시고자 할 때 눈을 멀게도 하시는 분으로 이해했다(신명기 28,28).
그래서 유다인 사회에서 성한 사람들에게 장애인들은 격리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온갖 불이익과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과부, 고아, 떠돌이,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잘 돌볼 것을 성경 곳곳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성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장애인에 대해서는 그러한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다리던 구원의 때가 되면 모든 장애 현상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는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는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6참조)
이사야 예언자의 이 말씀을 유다인들은 영적으로 이해하기도 했지만 또한 실제로 육체적 장애현상도 사라진다고 믿었다. 실제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오셔서 "눈먼 사람이 보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구원의 복음을 듣는"(마태오11,5)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마태오 8,17)이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말하는 허약함 속에 여러 가지 장애 현상이 들어가는 것은 마땅하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소경을 만나셨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저 사람이 눈이 먼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저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입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묻는 것은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당연한 질문이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병이 들거나 장애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나 조상이 저지른 죄의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기의 탓도 부모의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다"(요한 9,1-5 참조)라고 대답하셨다. 병자와 장애자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이해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혁명적이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그 사람이 장애자가 되었다고 보는 일반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 때문이라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장애 현상과 장애인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보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에게 있는 장애 현상을 오히려 하느님의 은혜를 입는 계기로 보았다.(2고린 12,5-12참조) 결국 성서는 심각한 장애로 인간사회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우선적으로 돌보심을 알려주고 있다. 하느님은 사람을 겉 모습에 따라 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겉 모습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사람의 속마음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신다.(1사무 16,7 참조) 따지고 보면 세상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저마다 어떤 점에서는 모두 다 장애 현상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드러나는 장애 현상을 갖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가면서 조화롭게 살려는 노력이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몇 해 전 한 중증 장애인이 한 말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다.
"저희들이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걷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보는 편견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평화신문, 제706호(2003년 1월 1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