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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핵심으로...

 

 

마돈나 하우스의 창시자인 캐더린 도허티(Catherine de Hueck Doherty, 1896-1985)

 

 

  

 

서 론

 

 

기도에 관하여 수많은 책들이 쓰여져 왔다. 하느님께서 책들을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분께서 우리가 기도의 책이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우리가 말씀이 되기를 원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모습을 반영했으면 한다. 그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기도는 매우 매우 단순하다. 많은 사람들은 마치도 신학과 영성 그리고 다양한 방법론을 배운 후에야 기도를 배울 수 있다고 여기며, 기도를 난해한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박사 학위자들과 말하려고 원했다면, 당대의 사회에서 이들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왜 랍비가 되지 않고 목수가 되었을까? 그분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했다. 그분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했고, 그들은 그분의 목소리에 젖어들었으며 너무나 단순하게 말씀했기에 그분의 말을 알아들었다.

기도가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면, 아이들 두세 명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보라. 우리가 하느님께 아이처럼 말할 때, 바로 그것이 기도다.

내가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져 천천히 수줍게, 신중하게 연인으로서 서로의 삶을 드러낼 때 그것이 기도다. 남편과 아내가 되어 위대한 혼배성사 안에서 충만한 사랑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신체적 영적 일치의 황홀한 침묵을 경험한다. 그 침묵이 기도다.

외로움은 기도다. 모든 남자와 여자, 결혼을 했거나 독신이든, 모든 소명은 외롭다. 그 처절한 외로움이 우리를 덮칠 때, 마치도 말 못하는 사람의 울부짖음처럼 우리의 깊은 마음 속에서 울부짖음이 치밀어 솟구친다. 그것이 기도다.

기도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 어떻게 기도를 정의할 수 있을까? 기도는 말로 표현되는 사랑이고 침묵 속에서 표현되는 사랑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기도는 두 사랑의 만남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 자녀의 사랑이 만나는 것이다. 기도에는 이 모든 것으로 충분하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고

 

 

들어 보셔요. 내 연인이 문을 두드려요. “내게 문을 열어줘요.”(아가 5, 2)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기가 왜 어려워야 하는가?

주님은 구약에서 우리에게 말씀한다. 비록 너희들이 모든 나뭇가지 아래에서 불륜을 저질렀다 해도, 나에게 돌아오라. 이스라엘아(호세 4,12.13; 14,2). 그리고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리라”(이사 1,18). 주님은 이스라엘의 신랑이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배우자다. 그리스도는 신랑이 되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한다. 시편은 사랑하는 이에게 오기 위하여 언덕을 뛰어넘는 그분에 대하여 말한다. 아가는 말한다. “,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아가 1,2)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그리고 사실인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하느냐고 왜 물어야 하는가? 아마도, 실제로 우리가 묻는 질문은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기도란 단순하게 우리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연인이 서로를 바라보듯이 하느님을 바라본다. 연인들은 손을 맞잡고 서로의 눈을 깊이 바라본다. 기도는 여인이 사랑의 행위를 한 후 남편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둘은 조용히 누워서 서로를 침묵 중에 응시한다.

침묵은 사랑의 위대한 표현이다. 그런 침묵은 깊고, 헤아릴 수 없으며, 끝이 없다. 그런 침묵은 이미 영원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 침묵은 하느님의 얼굴을 만지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 없이 인간은 그분을 응시할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다. 이러한 침묵은 그리스도를 포옹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얼굴을 만지며, 경험에 의하면 성령의 실제를 알고 있다.

처음에, 이런 침묵은 두려움으로 떨린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떨쳐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조금씩, 침묵은 조용해지고, 우리는 손을 뻗치거나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천천히 자신을 잃고 하느님 안으로 들어간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이 온통 고요해 질 때까지 하느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끌어당긴다고 표현하는 것이 낫겠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이 현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침묵은 하느님 나라가 우리들 사이에 현존하는 순간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무지의 어둠 속에서 받게 되는 지식이다. 이 어둠 속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그분 자신과 타인들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기도는 단순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분의 이름을 되풀이 말한다.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 현존의 기도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성의 창문을 닫고 마음의 문을 연다. 침묵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고, 입술과 마음에 하느님의 이름을 갖고 돌아온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현존의 기도를 되풀이 하며 살아가고, 이렇게 하여 우리는 기도가 되어간다. 기도가 되어갈 때 우리는 큰 기쁨을 얻는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비춘다.

그리스도는 말한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는가? 심지어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한다.”(마태 5, 46. 48) 우리는 어떤 사람을 싫어할 수 있으나 사랑은 미움보다 더 위대한다. 미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의 위대함에 들어있다. 미움을 극복하면 우리는 인간 그 이상이 되어간다. 그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한다면 우리는 초자연적이 된다. 사랑으로, 성 프란치스코는 나환자에게 입 맞추었다. 그런 사랑은 아무런 벽도, 경계선도 없다. 그런 사랑은 영원처럼 무한하고 하느님처럼 넓다. 하느님께는 제한이 없다. 이런 사랑은 모든 창조세계를 품는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질 때 올 것이다. 그분과 사랑에 빠지는 길은 우리의 무릎을 꿇는 것이다. 우리 안의 모든 것이 이 사랑에 빠지는 것에 저항한다. 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와 사랑에 빠지고 싶겠는가? 누가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현존하는 골고타의 언덕을 올라가고 싶겠는가? 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다른 편에, 비록 그것이 그분과 결혼하는 침상이라 하더라도, 못 박히고 싶겠는가? 십자가와 못 박힌 존재와 사랑에 빠진다면, 우리는 모든 앎을 넘어서는 기쁨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약속한 평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얼굴 앞에 모든 것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여전히 고통 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부족한 부분을 채우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한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되풀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이 시점에 도달하면, 기도는 노래처럼 우리 마음에서 샘솟을 것이다. 사랑이 기도를 떠받칠 것이다. 하느님과 일단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추악한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 병든 이들, 약물 중독자들, 살인자들 등등의 사람들을 꼭 좋아하지 않을 지라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질 때에, 우리는 연민과 온화함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연민과 온화함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선물들을 갖고, 우리는 수건과 물의 사람들이 되기 시작할 것이고, 모든 사람의 발을 씻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이고, 모든 사람들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밤에 나는 일어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을 것이다.”라고 아가는 말한다(아가 3,1. 2). 갑자기, 우리는 그분을 만난다. 그분은 여기 계신다. 이제,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다. 이제, 우리는 사랑하기가 쉬워진다. 시냇물이 강으로 흘러가듯 기도가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 나온다. 기도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세차게 흘러가는 사랑이다.

 

 

 

 

나는 기도하였다.

 

 

나는 노래와 웃음을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그랬더니 그분은 내게 눈물을 주었다. 푸른 계곡과 풍요로운 수확의 삶을 기도하였다. 그분은 나를 불모의 사막으로, 눈 만이 쌓여있는 언덕으로 이끌어 평화를 느낄 수 없었다. 나는 태양을, 많은 즐거움을, 그리고 반짝이는 물결 위로 항해하기를 기도하였다. 그분은 나에게 칠흑 같은 밤을, 별도 없이, 갈증에 허덕이는 삶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기도로 청했던 것보다 더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랑으로 아드님을 얻었다. 그분 목소리의 음악은 푸른 계곡이고 내가 항해하는 반짝이는 강물이다. 나의 영혼은 춤추고 있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는 어둔 밤에 끝없는 기쁨으로 춤을 추고 있다.

 

 

 

 

위험한 일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 42)

 

 

안토니 블룸 대주교는 기도의 체험이란 공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면으로부터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기도를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너무나 흥미롭고 떨리는 일이라서 하느님을 만나고 영적인 삶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의 함축된 의미는 그것보다 훨씬 더 원대하다. 기도는 모험이며, 그것도 위대한 모험이다. 위험, 모험을 무릅쓰지 않고서 우리는 기도로 들어갈 수 없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히브 10,31)

하루 온종일 홀로 단식하고 24시간 기도하는 광야 체험과, 사람들이 묻는 질문들을 보면, 기도를 마치도 모든 사람이 시도해야 하는 새로운 유행처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도는 우리는 전적인 내어줌으로 이끌어야 한다. 아니면 기도는 그저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밖에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전적인 내어줌을 우리는 두려워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분은 우리를 혁명의 길로 부른다. 더욱 더 끝없이 강력한 혁명에로 초대한다. 이 혁명은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 자신에게는 폭력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자, 일단 하느님을 만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께 가고 있는가? 대답은 마태오 복음 시작에 나타난다. 동방 박사들은 오랫동안 기다려 온 별을 보았다. 먼저, 그들은 믿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출발했다. 그들은 상황에 토론하며 앉아있지 않았다. 세 번째, 그들은 왕을 발견했고, 외양간에 도착했을 때 무릎을 꿇었고 경배했으며 예물을 바쳤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그분을 경배했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이다.

 

 

하느님의 손을 잡으며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 (아가 3,4)

 

 

 

 

주님의 손을 잡고 우리가 원하는 때에 그분께 말을 하자.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지 않는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을 잡는다. 어떤 때 우리는 그분께 말하고, 어떤 때는 그분께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항상 그분과 함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을 무릎을 꿇고 지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섬겨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언제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타인을 위하여 기도를 봉헌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름답고 경이롭게 우리는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들 때문에 바쁘고, 고용된 사람은 일로, 선교사는 가난한 사람들로 분주할 때에, 그들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에 우리의 시간을 내주고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계속하여 기도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계시고 우리가 일로 바쁘게 돌아갈 때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시다는 것을 안다.

기도는 단순하게 우리와 주님 사이에 한결같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기도는 그분과의 대화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떻게 말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이야기에 즐겨 귀를 기울이시고 특히 우리가 그분에게 귀 기울이는 침묵의 순간을 즐기신다. 우리들 대부분은 흘러가는 삶을 따라 기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익숙하다. 실상,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리고 직접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그분의 문을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님, 제발 저를 들여보내주세요.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은 저에게 너무나 중요한 분입니다.”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우리는 그분이 말씀하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우리의 삶도 변화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듣고 또 듣는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 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과 그분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시작한다.

그분께 귀를 기울여보자. 그분이 말씀하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온 힘을 다하여 그분을 붙잡고 다른 모든 것을 떨쳐버리자. 하느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면, 다른 모든 것은 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싶다. 그분과 말하기 시작하면, 그때에 우리는 그분을 알기 시작한다. 천천히, 그분의 뜻은 우리의 뜻이 되어간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가는 입구다. 기도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하루 종일 우리는 하느님께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이 원하는 것을, 그리고 언제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할지 발견한다. 그분은 온갖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분은 친구를 원한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누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귀를 기울인다면, 그분은 그분 자신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것을 말씀해 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와서 말한다. “도시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기도는 이 장소나 저 장소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마음을 우리 자신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다. 기도는 내면화의 문제이다.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거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방문한다.

도시이든, 시골에서든, 기차 안에서든 차 안에서든, 하루 종일 일하고, 청소하고, 강의하고, 말하든지 간에,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께 깨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말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다. 잠들어 있을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아가 5,2)

기도는 하느님 앞에 고요하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어떻게 고요히 있을 것인가로 흥분된다면, 우리는 확실히 고요하게 있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내가 얼굴을 하느님께 돌릴 때, 나의 정신은, 나의 영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나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 앞에 고요히 머물며 성령을 기다린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가? 그분께 가까이 있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에 매달리고, 항상 함께 지내며, 생명을 다하여 복음을 가르치자. 우리의 온 마음, 온 정신, 그리고 온 영혼으로 복음을 가르치자. 복음을 선포하자.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기도는 우리 삶의 궁극적인 실제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류와 맺는 관계다. 어떤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하느님의 손을 붙잡을 수 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는 우리 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될 때, 우리의 말과 삶은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준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장 깊이 갈망하는 것의 원천에로 우리를 따른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기도다.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다. 다이아몬드의 모든 각면은 하느님의 의하여 닦인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분께 영광을 드린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우리를 기도로 만드는 것이 충분하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온갖 작은 방식으로 가족들을 섬기는 것 이 모두가 기도다. 공부하는 것도, 만일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기도다. 아픈 것도 기도다. 건강한 것도 기도다. 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의 어떤 각면도 그리스도인 삶의 측면이 아닌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우리의 지성을 통하여 알아들을 수 없다. 기도는 우리가 기도할 때에만, 하느님과 계속되는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수많은 다이아몬드의 각면을 닦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창조되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그분은 길을 열어놓는다. 길은 좁지만 지평선은 무한하다.

특히 기도에만 할당되는 시간들이 있다. 미사는 기도들 중의 기도이고, 그리스도와 우리의 일치가 구체적이 되는 하루의 순간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먹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마신다.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신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래서 그분과 우리 각자는 하나가 된다. 우리 영혼의 신랑은 또한 우리 신체의 신랑이기도 하다. 우리는 실제로 미사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미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미사는 우리를 온전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포옹한다. 어떤 심오한 의미에서, 우리는 미사가 된다. 미사는 우리가 하느님과 매일 조우하는 것이다. 미사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두 미사 사이에 오늘의 미사와 내일의 미사 사이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스러운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성무일도도 좋다. - 시편과 성경의 구절들,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체 앞에서나 개인 방에서 기도할 수 있다.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다양한 기도는 모두 아름답고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가장 위대한 기도들 중의 하나는 용서의 기도다. 양심 성찰은 모든 날의 최고의 순간이다. 우리는 하루를 돌아보며 가장 중요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본다. 그 중요한 관점은 바로 애덕, 자비다.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을 거부하거나 못되게 대했다면 사과가 필요하고, 다음날 확실하게 사과해야 한다. 죄는 죄이고, 신발 속의 모래알처럼, 발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사과한다. 잘못했다고 말하자. 매 순간은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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