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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인홀트 슈테허 지음, 장익 옮김, 분도출판사,

 

마지막 저녁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사람과 마지막으로 지내게 되는 저녁은 영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들은 기억에 남아 생전에 한 다른 많은 말들보다 그 무게가 더하다. 그의 마지막 소원을 마음에 새기어 존중하게 되고 그의 얼굴을 스쳐 간 마지막 미소와 끝내 지친 그림자도 잊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보낸 성목요일 저녁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이 만찬은 복음사가들의 절제된 어조에도 그 느낌과 전해진 말마디의 저 속까지 다시없을 감동으로 차 있다. 이날 저녁은 배반의 그늘과 성찬의 기적, 인간적인 실망과 푸근한 형제애, 극적인 충동과 되돌릴 수 없는 종국이 예감에 감싸여 있다. 이 마지막 저녁에 예수는 이를테면 유서를 쓴다. 그렇거늘 이 저녁마저도 수치스러운 측면을 면치 못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원래 아람어 말로 되어 있는, 예수의 첫마디는 귀담아들을 만한데도 제자들 잡음에 그냥 흘려진다. 그들은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날의 성대한 만찬은 신심 깊은 유다인들의 해방과 자유의 표시로 당시 상류사회에서처럼 두터운 보료에 비스듬히 누워서 상을 받았다. 그래서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나라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리란 다가올 하늘나라에서 차지할 계습, 칭호, 체통, 출세를 뜻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보료는 자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

예수는 바로 이날 저녁에 수천 년을 갈망해 오던 모든 일이 완수되어야 함을 안다. 이집트에서의 해방은 단지 서막이었고 사막에서의 만나는 입가심에 불과하였으며, 카나에서의 포도주도 하나의 전주곡이었음을 그는 안다. 그가 그토록 자주 이야기했던 하늘에서의 잔치가 바로 이제 신비스럽게 시작됨을 예수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도 다 이 저녁의 비극에 속한다. 숭고함과 가소로움이 뼈저리도록 한데 얽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얼마나 자주 벌어질 것인가. 교회 역사에서도 성사적 신비와 승진의 야심, 심오한 복음 말씀과 치졸한 권력 추구, 하느님 나라의 역사役事와 노골적 명예욕, 영원한 진리의 수호와 비속한 자기 과시 형태 등. 여기서 문제 되고 있는 것은 만찬에서의 째째한 자리다툼이 아니다. 예수는 당신의 일과 당신의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궁색함의 병존이라는 짐에 짓눌리고 그 위험에 놓인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읽어 나간다. “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그런데 이 의식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비천한 노예나 할 일이었다. 하필이면 이날 저녁에, 독실한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선택된 존재로서, 더는 노예 살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스라엘의 품위와 자유의 환희에 부풀어 있는 이 저녁에, 스승님은 이토록 격이 떨어지는 막간극을 벌이다니. 베드로는 항의한다. 그러나 헛수고다. 예수는 그들에게 점잖게, 하지만 단호하게, 자신이 직무와 책임과 선도 역할을 무엇으로 알고 있는지 밝힌다. 그것은 오직 섬김일 수밖에 없고 섬김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리 다툼 따위의 하찮은 웃음거리로 타락한다는 것이다. 섬김의 직무는 허영과 권력 의식에 맞서, 마음을 기울이고 참고 뜻을 밝히고 돕고 공감하고 권유하면서도 나 자신은 잊을 줄 아는 건전한 길이다.

그리스도상은 많이 있다. 우선 지구와 왕홀을 쥐고 있는 웅대한 전능자상이 있다.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운유한 착한 목자상도 있다. 그러나 성목요일에는 물 대야와 수건을 두르는 창조주의 모습이 특히 감명 깊다. 예수는 이 모습을 앞으로의 모든 시대를 위한 표양으로 유언에 확고히 남기고자 하였다. 이 감동적인 행동 하나가 미래의 교회를 위해 우리가 오늘까지도 요긴하다고 여길 만한 온갖 대책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올리브 동산에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 묵상에서 다른 어떤 것도 가볍게 여겨지는 그러한 주제에 다가선다. 고난이 그것이다. 살다 보면 불쾌하거나 역겨운 일도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할 말을 잃게 하는 형태의 인간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것이 가차 없이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자연 재난의 파급일 수도 있고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인간의 잔악이나 무책임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어이없는 묵언 중에 이런 우울한 의문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이런 일을 허락하는 신이라면 무슨 신인가.

믿음의 이러한 흔들림은 인류의 대재앙을 보고 일어날 수도 있고, 개인으로서 겪는 비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엄마를 아이에게서 앗아 간다면, 에이즈가 가족과 고장을 황폐화한다면, 뇌종양이 사랑하는 사람을 못 알아보게 바꿔 버린다면, 희망의 여지가 없는 진단을 내가 받는다면 그럴 수 있다. 어떤 때는 불운이 단골로 따라다니는 가족들을 만나기도 한다.

우리가 평생 잊지 못하는 경악의 기억들도 있다. 성서도 말문 막히는 고통을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물음을 비켜 가지 않았다. 이를 위해 한 시간을 택하였다. 그 시간에 그와 가까운 이들은 우리 모두도 그들과 함께 불가능하리라 여겼을 일이지만, 예수의 영혼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들여다보는 것이 이제는 허용된다. 사람들 사이에선 예수가 겉으로만 인간이고 영신적으로는 언제나 광대무변한 하느님 의식과 영광 안에 머물고 있으리라고 여기곤 한다. 하루는 초등학교 다니는 조그마한 소년이 내게 말하기를 예수님은 어차피 모든 일이 다 잘 끝날 것이라는 걸 아셨는걸료 뭐 하였다.

그러나 올리브 동산에서의 시간은 그와는 다른 것을 가르쳐 준다.

성 목요일 저녁은 실로 극적이었다. 어둠과 빛, 죽음의 예감과 형제적 유대, 배신과 성찬, 제자들의 좁은 도량과 온 세상을 품는 구세주의 사랑, 자리다툼과 위안의 언약. 그리고 이 만찬 끝에 올리브 동산으로 나가면서 찬미가를 부른다.

예수는 열한 제자와 함께 루카의 말로는 늘 하시던 대로겟세마니로 향한다. 그것은 분명 동산의 주인이 예수가 그곳에서 밤을 나도록 허락했음을 뜻한다. 예루살렘 가까운 주변에서는 수천 명의 평범한 순례자들이 노숙을 하였다. 단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안식일 길에서 3000보 이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키드론 골짜기는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예수는 돌담으로 에운 동산 입구에 제자 중 여덟 명을 머물게 한다. 그리고 친근한 제자 셋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고 나서 그 셋마저 거기 머물러 있게 한다. 그들은 예수의 기척을 들을 수는 있으나 이 셋 역시 내적으로는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 이제 그는 혼자이다.

내가 기억하는 바 심리학에서 인간의 근본적 부담은 이별불안(분리불안?)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년기에서부터 그렇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에는 고도로 발달한 통신수단에도 불구하고 고립이 있다. 누구나 노인 사목에 종사하는 이라면, 나도 그랬듯이, 이 고립에 대하여 많은 체험을 하게 된다.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그의 존재에서 우리네의 나락에 얼마나 깊이 내려갔던지 실패와 고립의 공포를 그 어떠한 완화의 묘약도 없이 끝까지 맛보아야 했다. 그는 그로 인해 수난하였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겪어 내야 하거늘...

더 나아가 예수는 우리를 소스라치게 하는 더욱 어두운 그늘에 덮인 듯하다. 그의 영혼의 밤은 하느님께 버림받는 체험에 이르기까지 짙어진다. 그는 내심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 반항한다. “가능하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 (그러나가 우리도 혹 체험했듯이 그렇게도 힘겨운데) -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여기에는 더 큰 무엇이 달려 있다. 모든 어두움을 무릅쓰는 그럼에도 사랑의 가장 감격적인 실증實證이 그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두려움을 무릅쓰고 하는 사랑을, 인간들에 대한 숱한 실망을 무릅쓰고 믿는 사랑을, 악의에도 불구하고 보복을 모르는 사랑을, 고립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위해 거기 있는 사랑을 당신 아들에게서 실증하신다. 이미 우리네의 일상에서도 그럼에도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동산에서의 어두운 시간에서 돌아온 예수는 전혀 다른 분이다. 이제는 결연하고 용감하며 정녕 초탈한 분이다. 우리라면 그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올리브 동산에서 보낸 시간은 위대한 시간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우시다.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이시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 본연의 됨됨이를, 그 성품의 눈여겨볼 점들과 인격의 진면목을 언제 가장 잘 알아볼 수 있을까. 많은 경우, 짓누르는 압박을 받고 있어, 체통이나 소위 이미지, 무슨 칭호나 명성, 재력이나 인맥 등이 다 무의미해지고 떨어져 나가 이른바 사회적 지위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어졌을 때에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 여러분도 참다운 친구는 역경에서 드러난다는 격언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드디어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위대함을 드러내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게 되는가. 그런 상황에서는 전혀 짐작도 않던 드문 덕성이 드러나곤 하는데 공익을 위한 투신, 사생활과 건강마저 바친 삶, 몰아적 마음가짐, 좌절의 수용, 정신적 역량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본연을 알아보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고난 중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복음서의 큰 몫을 차지하는 성목요일과 성금요일에 일어난 일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그의 본연의 신비가 말하자면 그 꽃을 피운다.

수난사에는 예수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번의 순간이 있다. 이 두 번의 순간마다 거의 사형선고나 십자가형에서 그를 구해 낼 어떤 길이 트이는 듯하였다. 그때마다 진리와 율법이 예수 편에 있었다. 그중 어떤 경우에도 묵비 또는 예수의 은근한 화법이 그를 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실제 품격에 관해 은밀하게만 말하였고, 치유를 하고도 소문을 내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였는가 하면, 왜곡될 우려가 있는 메시아 칭호는 아예 피하였다. 그런데 앞서 말한 두 번의 기회마다 예수는 전혀 자제를 하지 않고 자신의 품격을 밝혔다. 이 과감한 솔직성은 두 경우 모두 죽음을 의미했다.

첫 번째 극적인 순간은 최고의회 앞에서의 재판 현장에서 벌어진다. 우리는 그 과정에 관해 상세히는 모르지만 복음서들은 그 핵심을 짚고 있다. 카야파가 주재하는 최고의회 앞에서의 재판은 유다법에 따른 재판이다. 여기서 피고의 죄상은 오로지 증인들의 진술이 일치하여야만 확인된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네처럼 고발장을 읽고 나서 피고는 유죄를 인정하는가하는 물음으로 재판을 열지 않는다. 유다식 판사의 역량은 무고誣告일 경우 증인들을 어떻게 심문해야 스스로 모순에 빠져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게 하느냐에 달려 있어 증인들이 꼭 필요했다. 증인들의 발언이 서로 어긋나 그 거짓이 드러난다면 피고는 석방되어야 했다. 우리는 구약성서에 실린 목욕하는 수산나의 일화에서 그러한 재판 요령의 모범 사례를 본다. 젊은 다니엘은 그렇게 거짓 증인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성목요일 늦은 저녁 최고의회의 갑작스러운 소집령으로 모여든 주역들은 몹시 시간에 쫓겼다. 예수 사건을 처결하자면 성금요일 초저녁 6시까지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때부터는 여드레에 걸친 대축제가 시작되는데, 재판 절차는 물론 처형까지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대사제들은 그렇다고 예수를 장기간 구금하기는 두려웠다. 일은 서둘러 처리되어야만 했다. 게다가 또 빌라도의 동의도 얻어 내야 했다. 최고의회가 판결을 내리는 데에는 그 구성원의 일부만으로도 족했다. 예수와 혹 동조하거나 강권 행사를 꺼리는 의원들에게는 틀림없이 소집령을 전하지 않아, 니코데모 같은 이는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증인도 두 사람씩 준비시켜야 하는 터에 부득이 몹시 서두르다 보니 재판 준비가 허술했던 듯하다. 하기야 막강한 대사제들은 수하에 자기네 뜻대로 그런 증인 노릇을 거침없이 시킬 만한 자들을 얼마든지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그 증인 등장이라는 것이 빗나갔다. 여러 쌍의 증인이 차례로 등장했지만 그들이 예수를 거슬러 한 말들은 서로 맞지가 않았다. 복음서에 뚜렷이 언급된 마지막으로 나선 한 쌍의 증인도 성전 파괴 운운하며 예수를 고발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다 보니 재판은 극히 곤혹스러운 고비에 이른다. 증인들이 실패하면 유다인인 피고는 석방되어야 한다.

이에 카야파가 일어나 피고에게 직접 말을 건다. “이자들의 증언에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예수는 입을 다문다. 그의 침묵은 뚜렷하다. 당신은 내게 물을 어떠한 권한도 없으니, 증인들에게 물으시오... 그러자 이제 중차대한 장면이 벌어진다. “살아계신 하느님앞에서 명령하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밝히시오.” 이 극적인 순간, 정치적인 의미에서 결코 메시아로 여겨질 수 없는 사슬에 묶인, 예수가 침묵을 깨고 말하였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였소(아람어로 그렇다는 뜻).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오...” 여기서 예수는 뚜렷이 신적인 품격을 밝힌다. ‘하늘의 구름은 영원자의 지존한 품격의 상징이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신을 모독하는 죄로 사형 언도를 받는다.

두 번째 극적인 장면은 빌라도 앞에서 벌어진다. 빌라도는 예수가 어떠한 정치적 위험인물도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전혀 다른 이유로 예수를 제거하려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뿐더러 그는 최고의회와는 적대적인 사이였다. 다른 사료들에 의하면 유다인들을 미워하던 본시오 빌라도는 이미 선수를 쳤었다. 심문을 마치고 나온 그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하고 선언한다. 이 말 자체로 보면 석방 판결로 끝나는 로마식 재판의 폐정 선언을 뜻한다. 귀결은 또다시 칼날 위에 놓였는데, 빌라도는 속으로 두렵다. 유다인 봉기 선동자를 그냥 풀어 주었다는 문책을 로마로부터 받기 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가장 민감한 점을 짚으며 묻는다. “아무튼 당신이 왕이란 말이오?” 누구든 왕을 자칭하기만 하면 죽어야 하는 법이다. 예수는 또다시 자숙을 단호히 버리고 말한다. “그렇소. 나는 왕이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태어났소.” 빌라도는 이 사람의 나라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그 위험한 단어가 나온 건 사실이다. ‘을 자칭하는 자를 풀어주었다는 것이 로마에 알려진다면 티베리우스 황제(재위기간 14917- 37316)의 용서는 있을 수 없었다. 예수가 발설한 왕이라는 말이 종당은 빌라도로 하여금 양보하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였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우리가 비단 기억으로뿐 아니라 신앙으로 깊이 간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예수가 죽음을 맞은 것은 그의 신비스러운 품격과 구세주로서의 직무와 자신의 본연을 가리키는 신적인 상징을 당신 것으로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사가 모두가 확언하는 바이다. 우리들도 기도할 때 이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는 주님을 경배하며 찬미하나이다.” 우리로 하여금 꿇어 흠숭하게 하는 이 존엄을 그는 고백하였고 죽음으로써 확증한 것이다.

 

성금요일 밤을 비춘 번갯불

 

골고타에 드리우는 밤과 함께 우리는 구세사의 가장 깊은 어두움에 다다른다. 여기서는 외로운 십자가 형틀을 중심으로 증오와 선동, 잔학과 비정, 경악과 경직된 고통이 한데 엉겨 있다. 그 실상은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미화하며 애써 묘사해 놓은 모습보다는 사뭇 참혹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섬금요일 묵상에서 그저 어두움의 숨 막히는 시간 안에 갇혀 있고 싶지는 않다. 유심히 바라보면 이 전율의 한밤에, 밝은 번개가 마치 이른 부활 번갯불처럼 번쩍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먹구름 속의 이 빛을 조금 따라가 보겠다.

이렇게 출발할 수도 있겠다. 저마다 서로 전혀 다른 동기로 나자렛 예수를 반대하는 무리는 네 패가 있었는데, 이들이 사악하게 작당하여 예수의 낭패를 재촉하였다. 첫째 집단은 역시 예루살렘의 고위층으로서 한나스 일가의 지휘하에 놓인 수석사제들과 더불어 상류사회에 속하는 사두가이 계열의 최고의회 의원들이다. 이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서 예수를 두려워했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평판이 나빴으며 유다계 문헌에서도 좋은 소리를 못 듣는다. 이들 세상에서 통하는 것은 돈과 권력과 성전 관리권 그리고 로마인들과의 적당한 협잡이었다.

예수 반대파 중 둘째 집단은 근본주의적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이다. 이들은 형식주의와 자기네 위상에 대한 자만에 기울어 있었다. 첫 번째 집단과는 달리 유식했고, 거듭 유념할 점이지만 바리사이 신분에 속하는 만큼 진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집단이 예수와 날카롭게 대립한 까닭은 예수가 그들 마음의 경색과 도덕적 우월감, 외적 격식에 대한 집착, 서민에 대한 멸시 등을 지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나자렛 사람을 미워했다.

셋째 무리는 본시오 빌라도와 그의 병정들이다. 본시오는 본래 야당 출신이면서 원로원에 대항하다가 자신의 출세가 위태로워지자 결국 굴복하고 만 정치인이다. 그의 병정들은 벌써 여러 해째 유다인 의용대원들과 게릴라식 격전을 벌여 왔었다. 화해할 줄 모르는 그 강경 일변도는 불행히도 오늘날 성지에서 보는 바와 똑같았다. 이들 병정은 열성당원 또는 성전 혁명당원을 상대함에 있어 자신을 무슨 검사劍士로 알았고, 유다인 해방운동가들의 한 우두머리로 보는 예수를 마침내 자기들 손아귀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매질한 다음 가시관을 쓴 승전 장군으로 조롱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네 번째 집단은 바로 해방운동가들이었다. 예수는 이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치적 메시아이기를 줄곧 거절했다. 그래서 한때 예수를 왕으로 받들기를 원했던 그들은 그에게 실망하였다. 예수라는 나자렛 사람에게서는 그들이 종교적·정치적으로 꿈꾸던 신국神國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이런 사고가 낯설지 않았다. 사도들 가운데 하나는 열혈당원 시몬이라고 불렸다.

예수는 서로 미워하는 이들 네 집단 모두에게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밤에 죽어 가며 매달려 있다. 그러나 거기 번갯불이 비치고 있다.

첫 번째 번개는 예루살렘의 부유한 고위층의 한 사람을 친다. 하나의 영예로운 무덤을 예수에게 내어 주기로 한 결단이 아리마태아의 요셉으로서 어떠한 용단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전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십자가형에 처한 자들은 쓰레기 더미에 갖다 버리는 게 통례였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신체적으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끝장이었다. 최고의회원 아리마태아의 요셉은 이 행위로써 그 사회에서 더는 살아 나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번개가 그를 쳤던 것이다.

두 번째 번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 니코데모를 친다. 그는 은밀하게 예수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예수의 죽음을 보자 그는 모든 조심을 떨쳐 버린다(틀이 잡힌 지성인들은 흔히 소심한데가 있다). 그가 한번은 밤의 어둠을 타고 예수와 이야기를 나누러 온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성금요일 밤에는 자기가 예수를 믿음을 고백한다. 대축제를 맞은 마당에 율법을 엄수하는 바리사이로서 시신을 상관한다는 건 대담한 일이다. 이로써 그는 전례상 부정 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니코데모는 이 시간에 모든 조심을 떨쳐 버린다. 번개가 그를 쳤기 때문에.

세 번째 은총의 빛발은 병정 중의 하나인 백인대장을 비춘다. 그는 벌써 수많은 처형을 지켜보았는데, 형벌의 고통을 겪는 자들은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가해자들을 저주하게 마련이었다. 저주가 바로 최후의 마법적 무기였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이제껏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말을 듣자 그는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셨다하였는데, 그의 배경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사람은 범죄자가 아니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지라고 말하려고 했으리라. 이번에는 무자비한 전투와 살육으로 굳을 대로 굳은 로마 군인의 강철 갑옷을 섬광이 뚫은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부활 번개는 네 번째 경우에서 빛난다. 이런 번갯빛은 그리스도 곁에 달려 있는 광신자, 로마의 압제에 맞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마지막 숨까지 싸워 온 테러 집단의 한 사람을 스쳐 간다. 성서에서 그들을 다소 부당하게 강도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세계사에서 거듭되는 꿈, 그러나 피와 비참으로 끝나고 마는 정치·종교적인 꿈을 위하여 싸워 온 사나이다. 그런 그가 이제 말한다. “선생님, 당신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전혀 다른 메시아 왕국에 대한 희망이 비치기 시작한다. 이런 빗나간 폭력으로 물든 그의 인생 위에 골고타에서 가장 위안을 주는 말씀이 들려온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야말로 구세사의 가장 어두운 밤에 영원한 부활이 번쩍 비쳐 온다.

성금요일을 마냥 절망적인 암흑에 남겨 두지 않는 것이 이 번개 빛발들이다. 번개는 모두를 비추고 지나간다. 예수를 거슬러 공모하던 자들, 상류사회의 부자, 숨 막히는 율법학자, 로마 군대의 장교, 종교·정치적 광신자, 모두를. 그러면서 주님은 성금요일의 번갯불들로 어떻게 앞으로 승리할 것인지, 아니 어떻게 우주적으로 승화할 것인지를 보여 준다. 그것도 그의 제자들이 바랐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주님은 마음들을 움직여 승리하고자 한다. 십자가와 은총으로 승리하며 그 승리의 길은 영원한 영광으로 이끈다.

 

암흑의 시간에서 영원히 그칠 줄 모르는 이 메아리가 우리에게 울려 와야 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금요일 밤은 암담하게 어둡지만은 않은 것이다. 죽음과 낭패만도 아니요, 증오와 악의의 승리만도 아니다. 십자가의 시신을 꿰뚫고 은총의 승리가 비춘다. 성금요일은 그 뒤에서 번개 빛발이 번쩍이는 뇌운雷雲일 따름이다.

 

예수하느님에게 버림받음 그 다른 내면

 

우리는 아직 성금요일의 어두운 시간에 머물고 있다. 세계의 운명적 이 시간을 한편으로는 암흑의 시간으로 일컫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두목이 쫓겨나는 시간으로 보기도 한다. 누구든 수난사화를 읽거나 들으면서 구세주와,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이라면 마태오 복음 2746절의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의 외침을 들으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올리브 동산 묵상에서 예수가 극심한 영적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다. 가장 밑바닥까지 간 듯 보인다. 여기서는 예수의 마음에서마저 아버지와의 더할 나위 없는 일체감조차도 그늘지는 듯 싶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틀림없다. 인간으로서 그는 단 한가지 죄만큼은 정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인간 실존의 나락을 전부 우리와 같이 나누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한마디 기도였다. 기도란 결단코 절망의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이 충격적인 한마디 말에는 다른 측면이 하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가 개인적으로 지어낸 문구가 아니라 유다교의 기도의 보고인 시편을 암기하고 있었다. 이 시편은 죽을 지경에 놓인 가난한사람의 노래로 늘 여겨졌다.

예수가 이 시편의 첫마디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을 듣고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던 모든 유다인 적대자들은 적이 경악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버림받은 이 애소哀訴를 들었을 뿐 아니라, 그 시편 전체가 눈앞에 환히 보였던 것이다. 시편의 한마디 한마디가 연달아 망치로 때리듯이 바로 지금 실현된다. 그 시편은 적대자들의 어떤 들뜬 의기도 마비시킬수 있었던 것이다. 야유하고 멸시하던 자들에게도 그 시편의 구절들이 밀려오는 것이다.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도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나를 보며 업신여기고 머리를 끄덕대며 삐죽거리나이다. ‘주께 의탁하였으니 구하시렷다, 그를 사랑하시니 빼내 주시렷다’...” 그들은 겨우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시편은 이어진다. “마치 엎질러진 물과도 같이 내 모든 뼈들은 무너났나이다. 밀초같이 되어 버린 이 내 마음은 스스로 내 속에서 녹아 버리나이다. 기왓장처럼 내 목은 칼칼하고 내 혀는 입천장에 들러붙었고...그들은 내 손과 발을 묶어 죽음의 먼지 위에 앉혔나이다...” 시편 작가는 수백 년 전에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의 처지를 어찌 이토록 적절히 묘사할 수 있었을까.

또 이어 내 뼈는 마디마디 셀 수 있게 되었어도 그들은 익히 보며 좋아라 나를 보고 있나이다.”(로마인들은 가급적 많은 구경꾼이 모이는 곳에서 십자가형을 집행하였다)

시편은 이어 나간다. “저희끼리 내 옷을 나눠 가지고 내 속옷을 놓고서 제비뽑나이다.” 로마군의 관습에 사형 집행 부대가 범죄자의 옷가지를 차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시편은 예수의 적대자 중 바리사이 또는 사두가이 진영의 글을 볼 줄 아는 자들이 아연실색하며 이행해야 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이 시편 전체를 아는 자라면 한마디 한마디 다 알고 있는 그들로서 이 시편이 종국에 가서는 하나의 승리의 노래처럼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신 이름을 겨레에게 전하고 그 모임 한가운데서 주를 찬미하오리니... 가난한 이를 배부르게 먹이리이다. 야훼를 찾는 사람들이 당신을 기리며, 세상의 모든 권세가들이 그분께 경배하고 나의 영혼은 주님을 위하여 살리라... 나의 후예는 당신을 섬기며 미래의 세대에게 주를 들어 말하오리다...”

성금요일에 번갯빛이 비친다고 말한대로 낭패로 보이던 그날이 실제로는 이미 부활의 조짐으로 차 있다. 시편22장을 다 읽으면 그분께서 다 이루셨다라는 끝마디로 맺는다. 요한복음서 1930절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가 아닌가. 예수가 이 예언적인 시편의 첫마디와 끝마디를 기도함으로써 이 시편에 담긴 내용 전부가 바로 이 자리에서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편이 말하는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해당하며 바로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편 안에 성금요일의 모든 참상과 아울러 내일의 확실한 승리가 함께 나타난다. 그렇기에 예수의 적대자들에게는 하나의 엄청난 경악이었다. 그들은 골고타에서 승리감에 들뜨기는커녕 불안하고 심란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갔다. 처형된 이 사람의 사안이 종결되지 않고 일견 승자로 보이던 그들을 숨 막히는 예감으로 억누른다. 그리고 그들의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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