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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서 영적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거듭 강조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맑고 깨끗한 샘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영적 독서는 우리의 메마른 영혼에 생기를 주고 더렵혀진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며 우리를 각성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특히 성인들이나 뛰어난 영성을 지닌 신앙인들의 글을 통해 우리는 그분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났는지, 신앙생활에서 어떤 의문에 부딪쳤고 어떻게 풀어 나갔는지, 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하여 마침내 어떻게 사람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 김수환 추기경

 

요한복음산책1.

삶의 우물가에 오신 말씀 송봉모 지음. 바오로딸 출판사

 

2. 기쁨과 축제의 삶을 사신 예수님

 

예수님은 기쁨과 흥을 소중히 여기고 즐기신 분이셨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통의 인간으로만 생각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기에 평생을 엄숙하고 슬프게 사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전 생애가 정말 언제나 슬펐을까? 아닐 것이다.

예수님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셨지만 삶의 기쁨을 놓치고 사시진 않았따.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 분답게,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분답게 어려움과 곤란 중에서도 내면의 기쁨을 잃지 않고 사셨다.

그분은 삶을 경이와 기쁨, 축제로 대하셨다. 예수님에게서 삶은 경이와 기쁨과 축제였다.

예수님이 삶을 경이와 기쁨으로 대하셨다는 점은 그분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는 자연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 들판과 추수(요한 4,25), 태양 빛을 받으면서 소리 없이 자라나는 씨앗(마르 4,28), 공중의 새들이 깃드는 보금자리(마태 8, 20),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이지만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조차 차려 입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백합꽃(마태 6,28-29)과 같은 이미지 뒤에는 창조세계를 향한 예수님의 경이와 기쁨의 태도가 있다.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다녀 온 사람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고적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니는 장면이나 강렬한 햇살에 반사되는 올리브나무 아래 군중을 가르치시는 장면, 또는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 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시는 모습 말이다.

예수님이 삶을 축제로 대하셨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든 비유들을 보면 잔치 이야기가 많다. 잃었던 양을 찾아도(루카 15,4-7), 잃었던 동전을 찾아도(루카 15,8-10), 잃었던 아들을 찾아도(루카 15,11-24) 잔치를 벌인다.

예수님이 자주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려 식탁 친교를 나누었다는 사실도 그분이 삶을 축제로 대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공생활 동안 하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루카 15,2) 일이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자주 여러 계층 사람들, 특히 사회적·윤리적으로 보잘것없고 비난받는 사람들과 기쁘게 음식을 나누었는지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삶에 대한 그분의 가치관은 삶을 축하하고, 축하하고, 축하하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그분을 조롱하며 먹보요 술꾼”(루카 7,34)이라 했겠는가?

예수님이 삶을 축제로 대했다고 해서 고통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인새에 기쁨과 고통이 함께하듯 예수님의 인생도 그러했다. 카나 혼인잔치에서 참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기쁨과 흥을 나눈 예수님이 라자로가 죽었을 때는 그의 누이들인 마리아와 마르타와 함께 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신다. 그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으로써 온몸으로 고통을 받으신다.

 

예수님은 왜 삶을 경이와 기쁨, 축제로 대하셨을까? 놀고먹는 것이 좋아서 그랬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당신의 삶이 하늘 아빠와 함께하는 삶이기에 그러했다.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고 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하늘 아빠의 돌봄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이 하늘 아빠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30)고 말씀하신 것 또한 당신 자신이 하늘 아빠의 사랑 어린 돌봄이 무엇인지 잘 아셨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도 하늘 아빠이신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다. 지금 당장은 곤란하더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내일이든 다음 주이든 몇 년 후이든, 그 일을 통해 아빠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돌보셨는지 깨닫게 된다.

 

예수님은 분명 진지한 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하고 심각하다는 것이 엄격하고 금욕적이란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은 진지했어도 삶의 기쁨과 흥을 아시는 분이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기쁨의 부활도 예고하신 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르 8,31).

 

사람들은 이 성경 구절을 예수님의 수난예고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고통스럽다고만 생각하며 임의 한 생애가 마냥 슬펐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나아가 성모님은 어떤가? 우리는 성모님도 평생을 고통스럽게 사신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기쁘게 사신 성모님도 생각해야 한다. 성모님은 소박한 일상 안에서 당연히 삶의 기쁨을 간직하면서 사셨을 것이다. 성모님이 늘 고통과 슬픔에 짓눌린 얼굴을 하고 예수님을 키우셨거나 가르쳤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처녀 몸으로 아기 예수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이들의 수군거림이나 율법이 주는 형벌을 생각하기보다는, “주님의 종이오니 그 뜻대로 이루어지조서.”하고 흔쾌히 믿음의 응답을 드렸고, 배 속이 아기 예수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다. 또 아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나자렛에서 소박하지만 기쁨을 누리며 사셨던 분이다. 당연히 보통 엄마들처럼 아들과 함께 많이 웃고 많이 행복해하고 깊은 신앙 안에서 누구보다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사셨을 것이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삶이 소박한 기쁨과 흥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삶 또한 그래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처럼 경이와 기쁨, 축제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신다. 요한복음 15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언급하면서 두 번째로 기쁨을 들고 있다(갈라 5,22-23). 그는 신자들에게 언제나 기뻐할 것을 권고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 16-18)

 

바오로에 따르면 우리가 언제나 기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 뜻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기쁘게 살기를 바라신다.

노리치의 줄리안(14세기 영국의 신비주의자)은 말한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느님께 돌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은 그분 사랑을 깨닫고 기쁘게 사는 것이다.”

언제나 기뻐하며 사는 것이 하느님 뜻이라는 바오로의 말에 어떤 이는 사람이 어떻게 늘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하며 어이없어 할지도 모른다. 교부 크리소스토모의 다음 강론이 이 물음에 답한다.

 

사람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기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리한테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둘러싸여 있다. 사랑하는 아들이나 아내를 잃을 수 있고, 친척보다 더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 재산을 잃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명예가 훼손되어 상심하는 경우도 있다. 사적 삶에서나 공적 삶에서 우리를 슬픔으로 내몰 수 있는 요소들은 곳곳에 잠복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우연히 이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주님 밖에서 기뻐하는 것들은 모두 변화무쌍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며 쉽게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참된 기쁨 안에 머물 수 있다.

그런데 슬픔이 다가오더라도 그의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그를 슬프게 해도 그의 기쁨은 증가된다. 채찍질, 죽음, 상실, 거부, 불의 등이 그를 괴롭혀도, 그것이 하느님 때문이라면, 그들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찬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누구도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이 크리소스토모의 인용문을 요약하자면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구원 받은 이의 표징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 안에서 기뻐한다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르다. 무엇이 이루어지면 나는 기쁠 것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쁨을 미룰 이유가 없다. 우리의 기쁨은 주님 안에 그 근원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상황에 따라 즐거워하다 우울해한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즐거움과 우울이라는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 것이다. 즐거움은 주변 환경에 의존하지만 기쁨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의존한다.

기쁨은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사랑으로 돌보고 계시다는 확신에서 오기에 항구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니 기쁨을 잃는다는 것은 신앙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 신앙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기쁨이 새고 있다는 말이다.

로마 교황청은 시성 조사 때 그 사람이 살아생전 복음을 사는 자로서 기쁘게 살았는지를 본다. 이러한 조사는 어쩌면 유명한 라틴어 격언에 근거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울한 성인도 없고 기쁨에 찬 마귀도 없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감각적 위로가 없어 힘들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쁨 없는 삶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사실 가톨릭 신비주의 전통에서 데레사 수녀가 겪은 영적 어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면 수많은 성인이 겪은 현상이다. 그러나 성인들이 하느님께 영적 위로를 받지 못했다 해서 내적 기쁨마저 잃었던 것은 아니다. 데레사 수녀는 계속해서 영적 고독을 느끼면서, 그러한 고통이 자신의 소명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자 사명의 가장 어려운 부분임을 자각하면서 영적 지도 신부에게 이렇게 썼다.

 

하느님의 처분에 따를 것,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이 바라시는 만큼

저에게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 어둠이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된다면,

아니, 누구에게도 그 무엇도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들판에 핀 하느님의 꽃이 되어 더 없이 행복합니다.

- 노이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961.

 

기쁨은 선택이다.

 

기쁨은 선택이다. 기쁨은 하느님께 대한 확신과 자신감에서 솟아나는 태도의 문제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태도의 문제다.

이러한 사실을 믿고 힘차게 살 것인지 아니면 비탄에 빠져 불평과 한탄 속에서 살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 있다. 거울은 결코 먼저 웃지 않는다. 거울은 우리가 먼저 웃어야 따라서 웃는다. 우리가 진정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언제 어디서나 웃음을 선택하며 적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시련과 어려움 중에도 기쁨을 선택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채찍질 당하는 것을 기뻐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당하는 것을 특권이라고 여겨 기뻐했다. 그들의 믿음이 그러한 태도를 형성한 것이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기뻐하기로 결심하자. 생의 경이를 택하기로 결심하자. 이는 현실을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정확히 인식하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기쁨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넘는 것이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구원받은 이의 표징이라고 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 기쁨의 표지, 기쁨의 표징을 잃어버린다면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신앙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동방정교회 신학자 슈메만은 신자들이 줄어드는 현상은 교회 안에서 기쁨이 줄어드는 것과 정비례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기쁨으로 세상을 이기면서 퍼져나갔다.

이제 교회는 기쁨의 증거자가 되는 역할을 그만둠으로써

세상을 잃어가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로 여행하던 가운데 주일을 맞았다.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경찰관에게 물어보았다. 경찰관은 소상하게 성당 위치를 알려 주었다.

경찰관이 가르쳐 준 대로 차를 운전해 가다 보니 소개받은 성당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성당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경찰관이 왜 가까운 성당을 소개해 주지 않았을까 궁금했지만, 어쨌든 소개해 준 성당을 찾아가 미사참례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경찰관을 만나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왜 가까이 성당이 있는데 멀리 있는 성당을 소개해 주셨어요?”하고 물으니 그 경찰관은 사실 저도 그 성당에 대해 잘 모릅니다만 그 성당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다른 성당에서 나오는 사람들보다 더 기뻐 보였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 예회를 든 것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언제나 기쁜 얼둘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통스러운데 기쁜 얼굴을 할 수는 없다. 아플 때는 아픈 얼굴을 하는 것이 정상이고 슬플 때는 슬픈 얼굴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의 기쁨은 고통과 시련, 외로움과 불행 가운데서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걱정이 있다고 거기에 완전히 함몰되어 초주검이 되고, 세상을 비관하고, 온 가족이 고통 속에서 헤맨다 하더라도, 그분이 주신 삶은 여전히 귀한 것이기에 기쁘게 살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고 또 기쁘게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자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3-4)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수많은 인간적 기쁨을 찾게 하십니다. 존재와 삶에서 드높여지는 기쁨, 정결하고 성화된 사랑의 기쁨, 자연과 정적에서 느끼는 평온한 기쁨, 때때로 일을 성공시킨 데서 얻는 꾸밈없는 기쁨, 순결과 봉사와 참여의 투명한 기쁨, 그리고 희생을 필요로 하는 기쁨 등을 찾게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기쁨을 정화하고 온전케 하고,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 - 교황 바오로 6, 그리스도의 기쁨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

 

기쁨은 주님 안에 그 뿌리를 두지만, 즐거움은 주변 환경에 의존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살아가면서 즐거움의 추구를 소홀히 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즐거움과 추억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축하하면서 사셨고, 벗들과 어울리고 즐기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신다.

특별히 이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구인과 비교해서 고통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말 표현에서도 볼 수 있다. 서구인들은 새가 노래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새가 운다고 한다. 운다는 것은 슬프다는 것이요 아프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새의 지저귐을 들으면서도 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고통 중심적 인생관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새가 운다고 할 뿐 아니라 여러 상황에서 자주 운다는 표현을 한다. 문풍지가 운다. 뱃고동이 운다. 매미가 운다. 자명종이 운다.

고통 중심적 인생관을 갖고 사는 사람은 조그만 고통거리가 생겨도 삶 자체를 회색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아예 기뻐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러기에 삶의 부정적 면만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어두운 소식에 더 관심이 있다.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다. 공동체의 부정적인 면만 들추어 내고 그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런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직 불평불만뿐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한국사회의 진정한 위기는 정치적·경제적 요인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너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사는 재미가 없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한국사회의 근본적 문제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놀 줄 모르는지! 논다고 해봐야 기껏 노래방에서 넥타이를 이마에 매고 오버하거나, 폭탄주나 마시는 정도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부터 노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노는 것을 시간 낭비라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요, 나아가 잘못이라는 생각까지 한다. 이런 태도로 살다 보니 죽음 앞에서 인생을 되돌아볼 때 남는 것이 거의 없다. 김정은 교수의 말이다. 사람은 죽을 때 걸걸걸하며 죽는다고 한다. 호탕하게 웃으면 죽는다는 게 아니라 세 가지 무엇을 했으면 좋았을 걸.’ 후회하면서 죽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더 베풀고 살았으면 좋았을 걸.’ 두 번째는 더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았을 걸.’ 세 번째는 더 즐겁게 살았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말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축제로 가득 차 있다. 설날·한가위·생일·결혼기념일 등을 경축하는 것은 물론이요, 각종 기념일과 입학식, 졸업식도 있다. 한 해가 리듬도 맥도 없이 그저 지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념일을 형식적으로 기념하기보다 인생을 생동감 있게 살아가며 축하하고 기념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아가 할 수만 있다면 나이에 관계없이 젊은이의 마음을 갖고 살면 좋겠다. 요즘 젊은이들은 별별 기념일을 만들어 내며 삶을 즐긴다. 빼빼로 데이,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자장면 데이, 만나 지 100일 기념, 만난 지 200일 기념. 그들은 그렇게 작은 축제를 만들어 가며 즐겁게 산다.

젊은이라고 해서 늘 신나는 일만 있을까? 젊은이야말로 미래에 대한 고민과 불확실성으로 마음이 어둡다. 그런데도 여전히 웃고 즐길 수 있는 것은 삶은 즐거운 것이라는 기본적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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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은 2018.06.17 21:32 (*.38.120.244)
    주임 신부님 신앙강좌를 듣고 송봉모 신부님 책을 두어 권 샀습니다. 어렵지 않지만 그 어떤 책보다도 깊은 뜻을 가진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우물가에 오신 말씀'이라는 책은 제가 좋아하는 요한복음을 잘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라파엘 신부님 감사합니다. 책을 읽으시고 요약해서 저희 손에까지 오게 하신 그 모든 수고로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흰 참 복이 많은 신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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